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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Mar 08. 2022

세계 여성의 날,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두 여성

- 허난설헌과 나혜석을 기억해 봄

나는 실로 미련이 많았다.

그만큼 동경하던 곳이라 가게 된 것이 한없이 기쁘지만 내 환경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젖먹이 어린 아이까지 세 아이가 있고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칠십 노모가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심기일전의 파동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일가족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드디어 떠나기를 결정하였다.

- <꽃의 파리행- 나혜석>, 떠나기 전의 말 중에서


조선 여자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 <꽃의 파리행>의 서문 중 일부이다. 1927년 조선의 여자 나혜석은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남편과 함께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1년 8개월간의 구미 유람을 떠나게 된다. 떠나기 전 복잡한 심경이 위의 짧은 서문에 잘 배어 있다.


"나는 실로 미련이 많았다."

이 외침의 공명이 지금도 전해지는 듯 하다.


책 선물을 해주겠다는 지인에게서 <꽃의 파리행>이라는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를 선물받았다. 내겐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다. 나혜석을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나도 나혜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짙게 깔려 있는 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스럽기 때문인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나혜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찍이 바로 알고자 애쓰지 않은 것이다.


1월에 나를 먼저 찾아온 나혜석을 바로 마주하지 못한 재 두 달의 시간을 보낸 뒤, 3월 1일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나에겐 커다란 숙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만난 나혜석을 직접 만나기 위해 더 큰 용기를 내어 경기도 수원에 있는 '나혜석 거리'에 다녀왔다. 한복 차림의 다소곳한 나혜석이 그 곳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조형물은 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나혜석상 뒤의 커다란 벽은 나혜석이 생전에 온몸으로 부딪혔던 사회의 보수적 벽을 상징하며, 흡사 소나무 형상으로 갈라진 틈은 사회의 벽을 깬 신여성의 진취적 면모를 의미한다.

- 작품명: 잠들지 않는 길/ 김도근(공동창작: 박수영, 김윤희, 오영은)


한복 차림의 나혜석보다 신여성의 모습을 한 이 모습이 훨씬 더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뚜렷한 여성 의식을 가진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성 운동가, 독립 운동가, 언론인 그리고 페미니스트.

- <꽃의 파리행> 엮은이의 글 중


나혜석에 대한 더 이상의 구구절절한 소개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석과 평가는 각자의 가치관에 맡겨야 함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어야 할 시대가 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살포시 앉아 본 나혜석 상의 옆자리. 잠깐 동안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구미 유람 중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연애가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국의 길을 걸었던 불운의 그녀는 얼마전 간월암에서 만난 만공스님과의 인연도 가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불교계를 지켰던 만공스님, 만공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일엽스님(출가 전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원주. 나혜석과 함께 여성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일깨움)과의 인연으로 수덕사에서 머물기도 했었단다.



수원에서 나혜석과의 짧은 만남을 가진 후 다음으로 향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초월읍 지월리. 바로 허초희, 난설헌의 묘가 있는 곳이다.


중부고속도로 자동차 소음이 쉴 새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먼저 보내고 가슴 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보듬고 있다.

- 신영복 저,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안동 김씨 재실이 왼쪽에 자리한 돌계단을 오르면 먼저 보낸 두 남매를 보듬고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허난설헌의 묘가 가파른 언덕의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작은 두 아이의 무덤 앞에는 사랑스러운 조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난설헌의 오라버니 허봉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희윤의 묘비        
          - 허봉 지음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에 부치노라.


일찍이 여동생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오라버니의 안타까움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는 글이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라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의 좌절, 그리고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 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 신영복 저,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해마다 세계 여성의 날이면 떠올리고 했던 허난설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의 '초희'이다. 허난설헌 만큼이나 유명한 신사임당도, 조선의 왕비들 조차도 그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허난설헌은 아주 특별한 여성이었던 셈이다.


그녀의 이러한 특별함은 너무 큰 특별함이었기에 그 반짝거림을 사회와 시대가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임자헌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깊은 공부가 당시의 사회 구조 속에 스밀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허난설헌.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던 동생 허균의 피눈물을 감히 짐작해 보려 애써보았다.


단지 그녀의 천재성을 꽃피우지 못한 안타까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병들어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시대정신이 있는지, 보다 넓고 깊은 시선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를 돌아보며 여성의 날을 맞이하자는 <마음챙김의 인문학>의 저자 임자헌 작가의 글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오늘 하루 종일 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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