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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May 25. 2022

초등 2년생의 철없던 기억 한 조각

- 두 자릿수 받아 내림 뺄셈을 가르치다가 문득 생각난 유년시절

어릴 때 다니던 섬마을 시골 교회에서의 기억이다. 외할아버지, 할머니 무릎에 앉아 성경책을 뒤적이다가 문득 나도 어른들처럼 성경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5살 후반? 혹은 6살 때가 아니었나 싶다.

또 한 번의 어렴풋한 기억은 아빠가 보시던 신문(그건 농민신문이었지 싶다)을 펼쳐보다가 글자를 줄줄 읽어 내려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기억이다.


집안 어른들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흠뻑 받고 자란 어린 나에게 특별히 누군가가 한글을 가르쳐 주진 않았던 것 같다.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아니었으니 그 시절엔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내가 교회에서 성경책을 줄줄 읽는 기적을 행했고 그 이후 더욱 기고만장한 내가 되었던 기억 한 조각.




이건 내가 정확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 중반 즈음, 학교에서는 두 자릿수 덧셈과 뺄셈을 배웠고 숙제도 제법 있었다.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갈 나는 아니었으나, 숙제를 하다가 문득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던 동네 친구가 푼 답을 몇 개 보고 베꼈다. 

사건의 발단은 거기서부터였다. 그 모습을 우리 이모가 보았고 그걸 엄마에게 고해바친 모양이다.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들어오신 엄마는 나를 야단치셨다. 친구 숙제를 보고 베꼈다고 말이다. 당시 엄마는 이 사건을 기회 삼아 나의 버릇(기고만장한)을 고치려 하셨던 게 틀림없지만 거기에 굴복할 내가 아니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외할머니의 뒤에 숨어 엄마의 몽둥이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고, 심지어 잘못을 인정하지도, 잘못했다는 말 조차도 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분했다. 내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의 행동을 일러바친 이모의 행동이 너무나도 괘씸하게 여겨졌다. 


결국 작은 전쟁에서의 승자는 나였다. 그때 엄마는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그 이후로도 엄마는 나를 한 번도 이겨보신 적이 없고,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엄마와 상의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던 결혼 전까지의 내 모습이 오늘 문득 떠올랐다. 받아 내림이 있는 두 자릿수 뺄셈을 초등 2학년 녀석에게 가르치면서 말이다.



지병이 있었대서 지금도 어리광이 심한 그 친구는 머리는 끝내주게 좋지만 잔꾀도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그런 친구와 몇 주간 두 자릿수 덧`뺄셈 수업을 하다가 드디어 오늘 유년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된 것.


그냥 스치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저녁이 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구순이 지나신 외할머니 생각,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실속만큼은 확실히 챙기는 이모,

이젠 총기가 예전 같지 않으신 친정 엄마...


유효 기간이 지나기 전에 세 분께 안부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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