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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노트 Oct 12. 2023

목요일의 커피

2023.10.12.THU / 10:00 / 호텔 아르마딜로 커피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난 뒤, 둘째 아이를 태운 유아차를 끌며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맑게 갠 아침 하늘이 펼쳐진 날이면 어김없이 산책을 하게 되는데,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단골 카페로 목적지를 정해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어제 새로 산 원두를 갈아 아침에 내려 마셔야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산책과 동시에 계획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즐겁고 가벼운 마음이 조금 더 차올랐다. 목요일만 되면 괜히 마음이 붕 뜨는 것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산책은 마치 '필터'를 닮았다. 드립 커피를 내릴 때 원두를 걸러주는 역할을 하는 그 필터 말이다. 원두 가루가 물을 머금으며 맛과 향을 내뱉고 나면 가루는 필터에 남고, 추출된 커피만 커피잔에 남는다. 산책을 하다 보면 이리저리 뒤섞인 생각들이 걸러지고, 가장 나에게 중요한 것만 남게 되는데 그런 과정들이 커피를 내리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동네 카페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을 마주쳤다. 내가 사는 동네는 대학가 주변이다. 부피가 제법 큰 유아차 덕분에, 나를 향해 걸어오는 대학생들 한가운데로 모세의 기적이 펼쳐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동네 카페의 위치가 대학교와 정반대에 있기에, 그들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유아차 끌고 다가오는 애 엄마 한 명을 위해 수많은 학생들이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차오름과 동시에 나의 대학생 시절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아, 나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일까?'

'수업 끝나고 친구들과 어떤 재미있는 일을 펼칠까?'

'어떤 꿈을 갖고 저 대학교를 지원했을까?




애 엄마가 되고 난 뒤의 오지랖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20대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차올랐던 게 아닐까 싶다. 가진 거라곤 꿈과 열정뿐이었던 나의 20대 시절을 회상하며, 30대의 후반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있으며, 한 직장을 오래 다니다 쉬고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겠다고 나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는 지금의 나. 역시나 꿈과 열정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여러 가지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동네 카페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나의 최애 메뉴인 '호텔 아르마딜로 라테' 한 잔과 애플파이 하나를 주문했다. (원래는 에그타르트였는데, 애플파이를 맛보고 나서 순위가 바뀌었다!)




호텔 아르마딜로 라테는 아이스로만 마실 수 있는 커피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순서를 짚어보자면, 얼음이 담긴 컵에 가장 먼저 흰 우유가 아래에 깔리고, 진한 에스프레소가 우유 사이를 뚫으며 그 위에 담긴다. 그리고 밀도 높은 우유 거품이 가장 위에 놓인다. 카페 사장님이 우유 거품을 만드는 모습을 관찰했더니, 프레스기에 차가운 우유를 넣고 엄청난 속도로 펌핑을 반복하셨다. 그 덕분에 쫀쫀하면서도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맛볼 수 있었다.





호텔 아르마딜로 라테를 마실 때에는 지켜야 할 순서가 있는데, 첫 모금은 반드시 빨대 없이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만든 규칙이다. 커피 한 잔에 진심이라 이왕이면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을 나름 연구를 하는 편이다. 먼저 컵에 입을 대고 쫀쫀한 우유 거품과 함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 질감을 느낀다. 그 순간 바로 '음-'하며 감탄사가 나오는데, 그 순간이 이 커피를 즐기는 가장 첫 번째 순간이다. 



한두 모금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즐기고 나면 이제는 빨대를 사용할 차례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빨대를 휘저으며 커피를 섞지 않는 것이다. 고소한 우유 사이를 관통하는 찌릿하고도 진한 에스프레소의 맛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커피를 즐기는 두 번째 순간이다.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켤 때마다 우유와 에스프레소의 비율이 달라지는데, 이 지점들이 굉장히 흥미롭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렇게 다채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니! 4,500원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이 커피 한 잔이 이번 가을, 나의 최고의 커피가 되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 본다.










Today's coffee :  -  HOTEL ARMADILLO  -


☕️ Hotel Armadillo latte

호텔 아르마딜로 라테 (₩ 4,500)


✔️ Note

자체 블렌딩 원두를 사용한 커피

산미가 강하지 않으며,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짐

쫀쫀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특징

일반 라테보다 우유 양이 적어 진한 라테를 즐기기 좋음

아이스커피지만 쌀쌀한 가을과 잘 어울리는 맛



2023.10.12.THU.

@ 나영노트의 커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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