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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노트 Mar 11. 2020

나는 공항으로 출근한다

출근자와 여행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시간



오늘도 어제처럼 같은 칸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린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렸을 때 에스컬레이터와 가장 가까운 칸이기 때문이다. 공항철도가 도착하는 안내가 나오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열차가 도착하고 마지막 사람이 내리자마자 엄청난 순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아침부터 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사람들 틈에 고스란히 갇혀 진이 빠지기 일쑤다. 캐리어를 가지고 탄 사람이 많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이용하는 공항철도는 9호선에 비하면 천국이겠지만, 도착할 때까지 서서 가야 하는 괴로운 직장인의 입장은 다르지 않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열차를 타다 보니 어느 날부터 얼굴이 눈에 익은 사람이 보인다. 나는 사람을 한번 보면 꽤 오랫동안 기억을 하는 편인데, 그 사람을 발견하면 얼른 그 앞으로 가서 선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그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내릴 채비를 하면 나도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가 일어나자마자 빈자리에 얼른 앉는다. 앉아서 출근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가방 속에 넣어온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출근길을 제대로 만끽한다.




공항철도의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출입문 앞으로 다가선다. 열차가 멈추고 출입문이 열리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흐름을 따라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개찰구를 통과하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부터는 사람들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가방 하나 걸쳐 매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바쁜 사람들. 그리고 한껏 뽐낸 패션으로 캐리어를 끌며 여유를 풍기는 사람들. 바로 출근자와 여행자다.



 세계가 나뉘는 순간 나는 재빠르게 고민을 끝내고 슬쩍 여행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괜히 발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공항이 주는 설렘을 한껏 느껴본다. 외국어 안내방송, 북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살아있는 표정. 각종 요소들이 공항이라는 공간 안에서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킨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기울여본다. 어떤 항공사를 이용하는지, 출국 수속은  층에서 해야 하는지, 어느 체크인 카운터로 가야 하는지, 비행기 탑승 시간은 언제인지.



듣다 보면 그들의 동선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여행을 떠났던 지난날의 나와 남편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공항에 도착해서 무엇을 했고, 어떤 대화를 나눴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하나씩 떠올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사무실이 가까워지고 나는 자연스럽게 여행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출근자의 세계로 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공항, 창밖 뷰



취업을 준비하면서 공항으로 출근하는 것을 꿈꿨었다. 매일 아침 독서실로 출근해 1 책상에 앉아 가장 먼저  일은 다이어리를 펼쳐 다짐의 문장을  줄을 적으며 목표를 다지는 것이었다. 채용공고 일정에 따라 시험이나 면접이 가까워질 때면  문장의 온도는 더욱 뜨겁게 올라간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뜨겁기도 하면서 귀엽기도 하다.



의지가 약해지는 날에는 꿈의 공간이었던 공항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전망대 카페에 앉아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장면을 보며 여행을 꿈꾸기도 했고, 공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이곳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는 선들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는 마치 살아있는 여러 혈관들이 공항을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이곳에 흡수되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더욱 공항으로 끌어당겼고, 마침내 꿈이 현실이 되었다.



공항에 대한 로망이 가득한 채로 입사를 했기 때문일까, 주어진 현실 속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해외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징검다리 연휴는 물론 여름과 겨울 성수기 때의 여행자 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럴 때 공항은 호황이면서 비상이므로 현장과 밀접한 부서의 직원들은 어김없이 출근 당첨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할당된 현장을 돌아다니며, 공항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불편 사항은 없는지 점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항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여행객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어느 출국장을 이용하는 것이 빠른지, 자신이 이용하는 항공사의 체크인 카운터는 어디인지, 환전은 어디에서 하는지, 편의점은 어디에 있는지 질문을 쏟아낸다. 그러면 나는 어느새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 위치를 설명드리거나, 직접 같이 찾아가기도 한다. 현장으로 출근해 공항 곳곳을 다니며 마주하는 여행객을 볼 때면 나와 대비되는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도 황금연휴를 제대로 즐기고 싶은데, 연차가 늘 부족한 직장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인데, 나는 출근이라니!




그래도 나는 공항이 좋다. 연차가 쌓이는 만큼 공항에 내가 남긴 흔적도 많아지고 있고, 애정도 커지고 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라도 내 눈에는 내가 키운 자식같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록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느끼는 날들이 더 많을지라도 나는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건다.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출근길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이곳, 공항으로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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