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논 Feb 13. 2024

A ~열등감이 연애에 미치는 영향~

나를 잊은, 그리고 잊을 사람들 #2. 환경이 다른 사람들 간의 만남

(A의 에피소드는 전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A와 만나고 있을 무렵. 내 하루 스케줄은 대략 이랬다.


낮 시간 확보를 위해 가급적 1교시 수업을 신청했기 때문에 아침 9시부터 학교를 나간다. 학교는 1호선으로 편도 1시간 거리다. 오후 2시부턴 방송 동아리 및 교내 아나운서 활동의 녹화. 아니면 토익, 한국어, 일본어, 한국사, 시사상식을 번갈아가며 공부. 월수금 저녁은 방송 아카데미, 화목은 쇼호스트 아카데미로 향한다.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메이크업과 어피도 단정히 다듬어야 한다. 이 모든 스케줄이 끝나면 밤 9시. 10시부터 이자카야에 아르바이트가 잡혀있다. 집에 돌아오면 새벽 1시. 헬스장에서 1시간 씩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주말엔  낮과 저녁 각각 다른 아르바이트가 잡혀있는데, 주말에 종일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스케줄을 2개나 조정해야 할 만큼 번거로운 탓에 연애는 사실 사치였다.  


A의 삶은 달랐다. 그는 38살이 되도록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으며, 고급 사교육 아래 고액 과외 몇 번 해본 게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천혜를 누릴 수 있는 과학 연구직이었기에 대학원도 국가지원금으로 경제적 부족함 없이 다녔다.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그 덕에 세간에 떠도는 대학원생들의 자조적 유머코드를 공감하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나와는 출생부터 교육 수준, 나라에서 전공을 밀어주는 정도까지 모든 것이 다른 궤도였다. 그래서일까. A는 공감성과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주로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브레이크타임'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점원의 사소한 실수에 크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주말에 아르바이트 2개, 스터디 1개를 소화해야 하는 내게 덤덤한 말투로 "다른 날로 바꾸면 되잖아" 같은 말을 할 때였다. 이유도 시덥잖다. 광주에 가고 싶단다. 그저 전라도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할 뿐이란다. (지금 생각해 보자면,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은 날 위해 그런 코스를 제안한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A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겐 그런 시덥잖은 목적을 함께 할 친구가 없었다. 불쌍한 삶이라고 동정할 일은 아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애인, 사랑, 섹스. 이것이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애인과 섹스가 없는 여행은 기본적으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타인의 인생, 생활, 목표. 이런 것들이 얼마나 그에게 하찮은 문제였겠는가. 애초에 남이 자신에게 맞춰주는 인생을 살아왔지, 자신이 남에게 맞춰본 적 없는 삶을 걸어온 것을.


A의 의중이 뭐가 됐든 내게 코 앞에 닥친 문제는 '그딴' 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라기보단 일종의 동경. 아니,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르바이트만 안 할 수 있어도 타인과 안정적인 만남이 가능할 거란 자조에서 비롯된다. A 처럼 좋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스스로에게 하던 분노였다. 


뿐만 아니다. 왜 내가 굳이 '방송가' 입성을 하고 싶어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 걸까. 왜 나는 그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동경하기 시작했을까. 그런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만약 남들처럼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았더라면. 그 돈으로 그냥 방콕이나 다녀오고, 얼굴이라도 고쳤을텐데. 이렇게 생계 최전선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은 삶에서 연쇄되는 내 모든 것이 그냥 싫었던 때였다. (지금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이런 내게.  A는 눈부셨지만 성스러운 빛은 아니었다. 너무 뜨거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되는, 직사광선 같은 뜨거움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참을 없었던 것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바보취급 하는 A의 태도였다. A는 기본적으로 내가 방송가에 입성하지 못할 것을 언제나 전제로 말을 했다. 그저 어릴 아이돌이 되고 싶다며 전교생 앞에서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수준의 치기어린 정도로 생각했다.


우스웠다. 무언가를 위 열심히 살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감히 타인의 가능성을 재단하다니. 그렇게 가벼운 시즌제 꿈이었다면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살겠는가. 친구들 따라 공기업이나 일반 기업 입사를 준비하면 그만인 것을. 그게 언론고시보다 2배는 더 쉬운 길임을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 가시밭길을 버티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만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긴. 그의 삶은 그걸 굳이 선택지에 넣을 필요도 없는 상식 밖의 영역이었으리라. 


"다른 취업 준비도 같이 하는 중인 거지?"


이번에도 A가 무심한 듯 물었다. 토익 점수가 좀처럼 950점까지 오르지 않는다는 고민에 대한 답이었다. 동문서답도 이 정도면 국가 자격증 줘야 한다.


"나 학벌 별로 안 좋잖아, 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해서. 그럼 남들 하는 조건은 다 갖춰야만 거기서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거야. 누굴 탓하겠어. 어릴 때 공부 안 한 내 잘못이지."


그때도 지금이 싫었는데. 지금보다 저 멀었던 지금도 싫었다. 그 모든 싫었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나란 존재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팍팍한 현실이 싫어 신기루처럼 보이는 오아시스만 찾은 대가인 것 같다. 아, 싫다. 또 지극히 어두운 열등감이 올라온다. 저 빛이 강렬할 수록, 앞에 서 있는 내 그림자가 더욱 짙어진다. 여러 번 되풀이 한 광경이다. A는 언제나 내 이런 마음 저편에 있는 묵혀 둔 열등감까지 끄집어 내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그가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 길을 밟은 연구원 나부랭이가 토익은 커녕 컴활 공부 조차 해본 적 없을 텐데. 그런 주제에 저렇게 내 인생을, 가벼운 고민으로 취급하고 있다.


"다른 걸 할 생각 없이 그냥 있으니까 문제인 거야 항상."

"왜냐면 그 밖의 선택지는 그렇게 깊게 고민할 여력이 없다고!"


결국 똑같은 싸움을 되풀이했다. 그의 표정은 10살 이상 어린 아이를 만난 탓에 이런 철부지같은 어린 생각을 맞춰주기 힘들다는 기색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늙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또래들보다 사회경험이 부족하고, 제대로 된 조언 하나 해줄 줄 모르는 '애어른'을 만나느라 힘들어 했다. 지금 내게 연애는 너무 사치고, 이렇게 나와있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향한 내 최대한의 배려였는데. 그런 배려를 이리도 쉽게 무시하는 어른이었다. 


수 차례 싸움을 반복한 우리는 이전 편에 얘기했듯 이별을 맞이했다. 이후 문득 A가 머리를 스칠 때마다 깨닫는 부분이 있다. 사실 나는 A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살아온 방식이 싫었던 이유다


인터넷에서 슬픈 문구가 있다. 

"가난이 가장 슬픈 점은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이다"


A에게 느꼈던 감정도 그런 것과 비슷했다. 그"당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당신과 저녁을 먹을 돈이 없어져요" 라는 말을 기본적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받고 싶은 교육은 모두 받았고, 부모님들이 진행상황을 물어봐주는 환경에서 자랐다. 나는 달랐다. "그런 곳에 돈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라" 같은 가난한 소리나 듣는 팔자였다. 너무나 생생한 그 경험이 그에게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는 싸구려 가난 포르노에 불과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랫사람에게 위쪽 세계는 픽션이 아닌 현실이다. 위는 아래를 내려다 보지 않지만 아래는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A의 말은 내게 하나하나 묵직했다.


그래서였다. A가 하는 모든 말이 사사건건 시비와 비아냥, 철부지의 넋두리로 들리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그 이유였다. 어쩌면 그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초라한 나는 그의 눈부신 마음을 그대로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눈을 감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고작이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예언(?)대로 나는 언론/방송 쪽 일을 접었으며, 지금은 그저 평범한 회사에서 그저 그런 월급을 받아 아둥바둥 살아가는 소시민으로 살고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차라리 A의 말을 듣고 그 때부터 일찍 사회생활을 했더라면 지금보단 높은 위치에 있었을 거란 후회도 들 정도다. 그러나 다른 길 따위 쳐다 보고 싶지도 않았던 그 때의 나에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뜨겁게 달군 꼬챙이처럼 아팠다.


그는 몰랐다. 과학과 방송은 너무나 다른 결이다. 마치 음악과 문학이 서로 다른 예술인 것처럼. 그는 내가 매일 겪는 차별과 별천지를 모른다.


당시 내 세상은 이랬다. 학원을 가면 언제나 별천지가 펼쳐진다. 30만원 짜리 정장을 돈이 없어서 5년 같은 정장을 입고 참석하는 카메라 테스트 자리. (다행히 남자는 여자에 비해 그게 그렇게 티가 나지 않는다.) 반년 주기로 얼굴이 달라지는 경쟁자들. 쉼없이 1년 동안 집에서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다니는 같은 친구들. 메이크업 10만 원. 프로필 사진 12만 원. 그 비싼 경쟁자들은 매주, 단위로 받는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벌 뿐만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그들을 이길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 없다는 걸.


타인이 굳이 그걸 짚어주지 않았어도 됐다. 팩트폭력이랍시고, 오지랖이랍시고, 위해준답시고 뻔한 T짓거리 해봤자 어차피 10년 전부터 알던(외면했던) 내용들이다. 다만 놓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게도 그 길은. 장원영이나 카리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준비해 왔던 꿈이었다. 그걸 내 변심이 아닌 다른 외부적 요인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다. 실컷 부딪히고, 직접 아파보고, 그리고 펑펑 울고. 그 이후 후회없이 놓아주고 싶은 미련이었다. 그걸 왜. 직접적으로 학원비를 줄 것도 아니면서. 너무 쉽게 '다른 길' 같은 워딩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걸까. 반창고로 가려 둔 상처에 왜 더 빨리 낫는다고 알보칠을 발라줄까. 그 아픔을 감당하면서까지 빠르게 회복시키고 짚지 않은 상처였는데.


결국 나는 A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오래 준비했다가 그만 둔 사람의 말로는 결국 늦깎이 회사원, 아니면 단순 서비스 직. 그것밖에 길이 없다는 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38살의 나는 결코 A만큼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너무나 빠르게 통감했다. 그는 내가 아나운서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신했지만, 나는 내가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옆에 있어봤자 행복할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 그렇다. 관점을 바꿔서 말하자면, 그는 나를,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어쩌면 A는 너무 많은 걸 가져서 외로운 것 같아."


마침 좋은 핑계도 찾았다. 나의 꿈처럼, 나도 그의 지나친 외로움 타령에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던 때였다.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그 외로운 인생 반려자 찾기에 더는 함께 어울려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유지하자. 그게. 지금의 이 어둠보다 어두운 열등감을 표출하는 것보다 서로에게 나을 것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드라마에만 존재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아마 현실은 드라마처럼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은 무엇이든 비슷한 처지와 환경에 놓여야만 같은 생각을 주고 받을 있으며, 서로 이해할 있다. 그게 아니면 정말 깊은 고찰과 생각이 가능해야만 한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왕성하게 누군가를 만났던 나는,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지 4년의 시간이 흘렀다. A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 부분에 기인한 열등감에 휩싸였고, 그것이 곧 관계를 갉아먹는 일을 많이 겪었다. 나 자체가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던 지라 기본적으로 교양있는 분들과의 사랑이 잦았는데, 이 교양이 쌓인 여러가지 요소들이 결국 내 어떤 방식으로든 내 어두웠던 과거를 끄집어 냈다. 아마 나는 평생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 싶기도. 조금 더 사랑할 줄 알게 되고 난 이후부터.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연습을 한지 4년. 지금이라면 A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있을 같다. 


하지만 지금은 30대와 40대가 되어버린 우리다.

이제와서 A를 만나게 된다 한들 20대와 30대같은 반짝이는 만남을 하긴 어렵겠지. 어쩌면 우리는. 각각 시절에만 있었던 관계를 맺었던 아닐까 싶다.


A는 내게 그만큼 많은 영감과 반짝임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 지는 몰라도. 나 또한 그의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반짝거렸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어쩌면 함께 있었던 기간이 짧아 A는 나를 잊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이 이야기들은, 그런 A와도 같은 사람들에게 모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엮는 내용들이니까. 나를 잊은, 또는 앞으로 나를 잊을 사람들에게.  


ㅡfin.

B는 레즈비언이었다. 내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지금 한 가정의 어머니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B는 완전히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 바이섹슈얼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나를 잊은, 그리고 나를 잊을 사람들 시리즈]

만남, 사랑, 질투, 욕정... 어떤 관계든 반드시 근간이 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이를 잘 다스릴 줄 안다면, 인간관계는 그 어떤 책보다 좋은 성장촉진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내가 떠나보낸 가족, 친구, 동창, 연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지 정리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 경험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A ~나이에 따라 찾아오는 외로움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