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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뜨겁다

by 수말스런 여자

멧비둘기와 매미 소리 들으면서 영화 한 편 풀어 봅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가지가지로 뜨겁다. 7월의 막바지가 화통을 삶아 먹은 듯이 열기를 토해 내고. 민생회복 소비자 쿠폰이라고 하니, 이 땅의 상권도 살리고, 너나 나나 뜨거운 가슴으로 잘 써야 할 것 같고. 가장 핫한 이슈는, k 팝도 아니요, k 드라마도 아니요, 한강의 문학도 아니요, 오징어 게임도 아니다. 지금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이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으니 덥다 더워. 내가 젊을 적에 걸어온 세상은 광주 무등극장에나 가서 볼 영화가 배급사인 넷플릭스 앱을 터치하면 온갖 영화를 내 손바닥 안에서도 보고, 거실에서도 볼 수 있으니. 희한한 세상 속에서 난 한편으론 편하고, 한편으론 골 아프게 산다. 그런데 보아 하니 이 영화 자체도 희한하다. 한국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이 땅도 아닌 해외에서 제작되어 한국과 온 세계 사람들이 열광 중이라고 하니.


나도 풍문으로 들은 바가 있어 바쁜 와중인 지난 토요일에 얼른 접속해 들어갔다. 남은 기간도 급박해 겨우 한 번밖에 못 보고 가입 기한이 끝났다. 적어도 한 두 번은 더 봐야 세부적으로 관찰도 하고 이해의 폭도 클 텐데. 더구나 이 연세에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빠져들기가 어디 쉽겠는가! 그저 아그들이나 보는 만화처럼 느껴지니.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봤다. 처음 시작 부분은 그냥 뭔지 모를 혼란이다. 빠른 전개에, 화려하고 현란한 춤사위에. 21세기가 아닌 단군 조선의 때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고, 난데없이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질 않나, 전래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입성의 치마저고리의 불쌍한 민생고가 드러나질 않나! 우리야 친숙한 이미지지만, 외국인들의 눈에는 흡혈귀나 악마만 알다가 갓 쓰고 두루마기 걸친 젊잖은 저승사자의 캐릭터에도 뿅 가셨을까?


그런가 하면 금세 현대판 세상인 복잡한 강남 거리에, 남산 타워가 등장하고, han의원이라는 발상도 재밌다. 영화 곳곳에서 우리의 먹거리가 쏟아져 나와서 세계가 지금 폭풍 흡입 중이라니. 김밥을 입 터지게 쑤셔 놓고, 라면을 한 입에 후루룩 거리고, 깍두기 설렁탕에, 어묵탕, 새우깡 등등. 한국인의 정서를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줄로 꿰듯이 관통한 저 외국인 제작자들의 시선도 신기하다. 한국 사람들의 전문가적인 도움이 아니면 어림택도 없었을 것 같다. 아니면, 나를 남이 더 잘 알듯이 그런 건가! 상업성도 있고, 우정, 사랑, 볼거리도 있었다.


이만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는 루미를 주축으로 하는 3명의 걸그룹이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한다는 설정이다. 반대급부로 등장한 악의 상징인 보이스 그룹의 진우와 루미의 만남이 전개되는 묘미가 당연 압권이다. 두 사람 다 악마의 피가 자신 안에 흐르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을 처절하게 겪고 있다. 이 부분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인가. 우리가 진정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호랑이와 곰처럼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하는 극기 훈련만이 다가 아닌 듯도 하고, 시종일관 '믿사옵니다'로 절대자에게 엉겨 붙는 게 다가 아닌 듯도 하다. 루미의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게 아프게 다가온다. 세상은 숨기고 또 숨기라고 말하지만. 자신도 은폐하고 또 은폐하고 싶지만, 이건 아닌 거라고. 진실을 드러낼 때만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여기까지 일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난 내 나름의 소설을 써 본다. 아니라고!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진우와 루미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장면을 보라고.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난 바로 예수가 승천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삶은, 진리는 늘 역설이다.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십자가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이 먼저였다. 루미 또한 가리고 또 가리고 싶은 자신의 보라색의 꿈틀거리는 악귀의 흔적인 실체를 노출했다. 악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전자가 흐르고 있지만 그런 내가 바로 루미라고, 더 이상 회피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디 장롱 한구석에 깊숙이 신줏단지 모시듯이 간직한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받아들일 때, 아서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처럼 우리의 내면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또 이 영화가 단순히 보이는 장면대로 남녀의 사랑으로만 인지한다면 이건 프로가 아닌 초짜다. 루미가 진우를 만났다는 상징은 자신 안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회복한 것이다.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와 소극적이고, 보호받고 싶은 것들을 이겨냈다. 진우 또한 루미를 만났다는 상징은 자신이 잃어버린 여성성이 회복된 것이리라. 어린 시절 가난한 식구들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만을 위해 산 삶에 대해,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이번에는 회피하지 않은 거다. 곧 여성성이 살아난 거다. 타자를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는, 모성 같은, 이타적인 연민이 아닐까? 곧 예수의 사랑이다. 그저 감정에 매몰되어, 진정한 사랑도 아닌 어설픈 스캔들이나 일으키라는 게 아닐 것이다. 내 안의 잃어버린 여성성, 남성성을 회복할 때만이 진정 세상과 당당히 맞설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한 달란트 가진 자는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리라는 난해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202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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