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정 난 몰랐네

by 수말스런 여자

진정 난 몰랐네

어김없이 밤, 도토리 떨어지는 철이 됐다. 고향에 낙향한 지인은 어제, 밤 한 됫박쯤 부쳤단다. 난 먹는 맛보다 기다리는 감동이 더 크다. 밤이 오지만 정작은 식어가는 심장을 덥힐 따듯한 정이 오기 때문일 듯.


내가 사는 아파트 뒷문을 벗어나면 바로 야산이다. 난 걷다가 내 앞에 반질반질 떨어진 밤, 도토리를 보면 절대 그냥 못 지나친다. 주워서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에는 풀숲에 던지고 들어온다.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그런데 오늘은 난 왜 이리 해마다 이 일을 반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힌 유년 시절도 떠오른다. 내가 살던 집 앞에 축산 시험장이 있었다. 거기엔 도토리나무들이 많았다. 그땐 우린 상수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난 꼬마여서 그랬을까? 늘 마음껏 줍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다. 그걸 가지고 장난감처럼 놀았었는데. 어쩌면 난 지금 도토리 한 개를 주울 때마다 마음은 그 순간 먼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이젠 그리움으로 자리 잡은 그 시절의 추억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소환됐다. 축산 시험장에 다니시던 외삼촌부터, 그러다가 부모에게로 감정이 이입되자 눈물이 한 바퀴 핑 돈다. 그저 터진 주둥이라고 상처받았다고 지랄이나 떨었지, 부모 그늘 밑에서 내가 밥벌이하지 않아도 되는 그 편안한 세월은 어찌 그리도 철없이 살았을까 싶다. 그러고 걷고 있는데 나의 맞은편에서 오는 두 여자 중에 한 분이 밤 한 톨을 주우며, 야! 재밌네 하며 감탄사를 날린다. 또 걷다 보니 어떤 분은 물 흐르는 수로에서 줍고 있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태곤이는 노래하지만, 도토리는 어디에 있는지 산모퉁이 돌고 도는 도토리 줍는 풍경만 눈에 띈다. 다람쥐 먹이인 도토리를 줍지 않는 상식 정도는 다들 알고 있으련만. 저 사람들도 나 같은 심정일가? 그 옛날 5, 6십 년대처럼 먹을 게 없어서도 아니고. 더러는 가을에 별미로 도토리묵 만들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암튼 어쩌면 저들도 나처럼 도토리 향수에 빠진 게 아닌가 싶었다. 다들 도토리 한 개를 주울 때 마음은 순간 팍팍한 현실을 떠나 시공간을 초월한 저마다의 사연 속으로 이동하는 모양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들 산과 물을 헤쳐가며 주울까 싶으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