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말스런 여자 Nov 27. 2020

기억 소환 - 5


     

                        기억 소환 - 5

내 친구 해수기, 난 그녀가 좋다.
뭐가?  그냥, 내 친구니까! 근데,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이제 알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난 서울 살고, 그녀는 광주 산다.


60년 넘게 산 세월이지만, 정작  만난 날 수는  그리 많지도 않다. 여고를 졸업하고도  같은 동네다 보니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그런  중에 우리 집이 이사를 했고 소식이 끊겼다.

해수가!
생각나냐?  뚝방길 아래 공터에서 맨날 배드민턴 치고, 배구하던 기억들이. 발령 대기 중이던 교대 졸업생 총각이랑. 또 이 총각이랑, '아! 추월산이었을 거야.' 등산도 같이 다녀온 기억도 나고, 사직공원  근처쯤인가 네가 근무하던  직장에  놀러 간 일도 있었다. 너하고의  추억들이 세월 속에 잊힌 건지 많은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긴긴 세월 다 보내고, 칠흑처럼 검은 머리  따가운 세상 빛에 허옇게 다 바랜 뒤에야 우린 다시 만났다. 몇 년 전쯤  됐을 것 같다.  네가 퇴직한다는  무렵에야  우린 인사동 빛님이집에서 만났다.  그날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빛님이가 푸짐하게 차려낸 상에는  전라도 사람이면 환장하는  홍어에 막걸리잔 부딪치며  날을  새다시피 한 시간들을.  그래, 확실하게 기술한다. 넌 목사님 사모님이니까. 너는 술을 못해 마시는 시늉에 박자만 맞춰 줬지.  빛님이 집 술은 내가 다 퍼 마셨다. 명색이 나도 권사인데, 울 아부지는 이러고 사는 나를 여태 어쩌지 못하시네.

우린 얘기하다 보니  초등학교도 동창이요, 중학교, 고등학교에, 동네까지 같았다. 너  살아온 인생살이, 남편 얘기, 시댁 얘기, 친정 얘기, 고흥 바닷가에서의 교직 생활들. 그리고 나 살아온 얘기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통에  우리 빛님이는 저 살아온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막걸리 주전자만 나른 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동창 카톡방에서 네가  " 니가 1:0으로 이겼음 내가 졌다"라고  쓴  글을 읽는 순간  바로  내 머리를 치는 기억이 소환되더라.
아! 그래, 바로  그때부터  난  너를  진짜 좋아해 버렸다고. 그 인사동에서의 겨울밤에 네가 살아온 인생살이를 들으면서  어렵고 힘든 삶들을  뛰어 넘어서 참 아름답게 살았다는  감동이 밀려오더라. 네 시댁 식구들의 인품도  너네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도.
네 자식들의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도.

시아버지가 네 손을 잡고 "춥지야" 하면서 당신의 호주머니에 며느리 손을 넣고  걸으셨다는 시아버지의 사랑. 그 시절에 쉽지 않은  풍경이지.  네가 출산하고 교편생활 때문에 친정에 가서 쉬지도 못할 때 시어머니가 친정 엄마라 생각하라며  너를 딸처럼 돌보고 아껴준 시어머니 사랑 얘기.

한두해 전쯤 고흥에 친구들이 놀러 갔을 때 환대해준 너희  시댁 식구들의 인상은 각별했다. 시동생인지, 친정 남동생인지 헷갈리게 하는 구김살 없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들. 어디 이게 형수와 시동생의 멘트랴!  싶은 모습은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몸짓들의 정경이었다.

 너의 많은 시댁 식구들은 유난히 정이 많고  친밀감이 넘치는 보기 좋은 풍경이었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가정과 시댁 풍경을 난 내 주위에서는 보지 못했다.
단연코 네 남편은  말할 필요 없이 일등 남편이요. 아이들에겐 최고의 아버지였다. 일일이 에피소드를 나열할 수가 없다.

너는 시집 온 날부터 이부자리 네 손으로 개본 적 없고, 네 손으로 지금까지 화장실 한 번 청소해본  적도  없다고 했지.  모두 남편이 하고. 남편은 장가가는  아들에게  너도 네 가정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했다지.
네가 유방암에 걸렸을 때는 그렇게  서럽게 우는 남편을 보면서  너는 도리어 위안을 받아버렸다지.

네가 교사로 일하면서 시댁과 주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아온 삶들은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교사 신분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어려운 누군가에게  장사 밑천을 마련해준 일. 그 일도 쉽지 않은데, 나중에 자리 잡은 그분이 그 돈을 갚으려 할 때  넌 다 지난 일로 흘려보냈다지!

가출한 아이를 만나서는 그 아이가 홀로서기할 수 있도록  너까지 학원에 등록하여 그 아이와 같이  다니는 너를 나는 봤다. 내가 걸어온 삶은 네 앞에서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너에게 그날 밤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

 또 여러 대화 중에 네가 친정엄마와 올케와의 갈등에 대해  얘기했었다. 그때 내가  넌 딸의 입장에서 네 친정엄마 의견에  옳다, 그르다를  논하지 말고 무조건 엄마를 지지하고 인정해 주라고. 어머님도  당신들이 살아온  세상과 너무 많이 변해버린 세상에서, 시어머니의 위상을 예전처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의견을 말하니 네가 그때 그러더라.

"나 조금 기분 나쁘지만 너한테 설득당했다고".
그 순간  그 말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한편 시원하게 다가오더라. 아, '이게 이 친구의 화끈한 매력이구나'라고.  우린 살면서 상대방이 옳다고  인정하기가 참 쉽지 않더라. 속으론 이미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우리 남편과  언쟁이 벌어지면  타협점이  어렵더라. 남편은  내게 "난 너를 말로는 이길 재간이 없다" 하고. 그럼 난  또" 당신의 똥고집은 이 말로도 이길 재간이 없다" 고 맞선다. 또 더러는 나도 남편의 주장에  설득당할  때에도 너처럼 쿨하게  '설득당했다'라고 인정이 안 되더라.
 그날 인사동에서의 너의 '시원스러운  인정법' 이 신선하게 느껴졌고, 나도 나름  따라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동창 카톡방의 네 멘트를 보자, 오래 전의 기억들이 따라 올라오면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더 뚜렷이 다가왔다.

거기에 또 올여름 진도 바닷가의 추억까지  오래도록  행복하게 남겠지. 사진처럼 늘 시원스럽게 웃으며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해수기가 정말 좋다.

사랑스러운 내 친구야!
친구들이 기억 소환이라는 제목으로 진도 여행  사진들을 카톡방에 다시 올리니 나도 갑자기 너와 찍은 사진을 올리고 싶어 졌단다.


작가의 이전글 아름다운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