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저녁. 부탄에서 만난 풍경)
오늘도 비가 온다. 그것도 세차게 오고 있다.
장마가 끝나고 무시무시하다는 태풍도 갔지만, 오늘도 하늘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쏟아붓는다.
긴 장마에 지친 심신이 오늘은 더 지쳤는지 짜증이 나기도 한다.
습기 찬 집안이 그렇고, 눅눅한 장롱 속이 그렇다. 눅눅한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며칠 햇살을 만나 말끔히 말려놓은 집과 마음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마음을 졸이지만, 거대한 자연을 거스를 수 없기에 야속하기만 하다.
어렸을 적에 만난 비는, 조금은 싫었다.
오리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서 학교를 가야 하지만, 차를 타고 갈 차비도 없다. 그렇다고 우산도 없다.
방법은 고무신에 농사용 비닐을 쓰고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비닐을 요령껏 씌워주셨지만, 바람에 날리고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니 비닐이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다. 옷은 거의 다 젖었고 가까스로 어깨에 맨 책 보따리만 가까스로 젖음을 면했다.
이렇게 도착한 학교에서 공부가 될 리 만무하고, 돌아오는 길이 더 걱정이다.
중간에 놓인 돌다리가 빗물에 묻혀 옷를 걷고 건너기는 떠내려가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선생님들의 신세를 저야 하니 그것도 언제나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물살이 센 냇가를 건너 주면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와야 한다. 속 옷까지 젖은 몸을 추스르며 도착한 집에 와서야 안도의 숨을 쉬는 어린 시절의 야속한 비였다.
철이 적당히 들었을 무렵엔, 한 나절 여름 비는 그냥 좋기도 했다. 여름 비가 오는 날엔 냇가에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민물고기를 좋아하셨기에 어머니를 위해 할 일이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흙탕물이 흘러내리는 냇가를 뒤져 잡을 수 있는 고기를 찾아 한나절을 헤매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한 나절을 헤매고 다녔다. 빗속에서도 잡아 온 고기를 보고 어머니는 언제나 흐뭇해하셨다. 어머니의 흐뭇해하시는 얼굴을 보고 싶어 때로는 비가 오길 기다리기도 했었다.
나이가 들어 이것저것으로 바빠하던 때의 빗소리는 낭만적이라 좋았다. 후둑 거리며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좋았고,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도 좋았다. 하늘 높이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내리는 비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비가 오니 바쁜 생활을 잠시 접고, 한적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창가에 서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한다.
새벽녘에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없이 반갑다. 휴일이면 이불속에 숨어 늦잠을 잘 수 있어 좋았다.
추근대는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좋고, 한적함을 주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친구와 막걸리 집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빗소리에 마냥 취해 막걸리 잔을 비우는 것이 그냥 좋았다.
막걸리에 취해 쏟아지는 비에 온 몸이 젖는 것도 좋았다. 더 젖을 것이 없어 훨씬 좋았다. 내려놓을 것이 없으니, 더 젖을 것도 없으니 훨씬 홀가분해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기도 했다.
나이가 더 들었을 무렵엔 그런 사연을 실은 비가 야속하기도 하다. 무지하게 쏟아지는 비가 삶에 생채기를 낼까 봐 두렵기도 하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아닌가 해서 더 그렇다.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서인지 밤새껏 생각이 많게 한다. 주룩 거리는 빗소리가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도 한다. 농부의 일 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을까도 걱정이 되고, 삶을 송두리째 삼킬까 봐 더 그렇다. 세찬 비가 시답지 않은 인간들의 고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통쾌했지만, 선한 사람의 삶이 무너질까 가슴을 졸이며 두려워했다.
거대한 물줄기를 거스르고 오르려는 인간의 무모함이 가소로웠지만 막을 수 없어 울부짖었었다. 자연을 거스리는 오만한 인간들의 욕심에 진저리가 나고,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게도 욕심을 부려 무엇을 하려는지 묻고도 싶지만, 그럴 처지도 되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세월 앞에 내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를 바는 아닌데도, 그리도 처절한 것이 가엽고도 무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한 가지를 놓고 그리도 다르게 해석하는 인간들이, 자기만을 고집하는 인간들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날뛰는 인간들이 보기 싫어 이렇게 비가 오는가 보다.
그래서 더 세차게 오는가 보다.
그렇게 세월 따라오는 비도, 바라보는 비도 다양해진다. 오늘 저녁도 야속한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덥지만 창문을 닫아야 한다. 잔디를 가꾸고, 채소를 키우려면 비가 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요긴한 비지만 오늘은, 그쳤으면 좋겠다.
오늘도 야속한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린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원망스럽기도 하다.그리 생각하게 됨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인가 보다.
오늘 저녁도 비가 온다. 그것도 세차게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