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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Oct 17. 2020

소풍길에 만난 가을

(가을 소풍 1, 빅토리아 폭포)

하는 일은 없어도 몸은 고단한가 보다. 어제저녁엔 평소보다 두어 시간 일찍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껏 꿈도 꾸지 않으며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눈을 뜨니 아침 7시가 되었다. 그러니 9시간 잠을 잤다. 오랜만에 많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언젠가는 하루 6시간을 자면 하루의 1/4을 자는 것이다. 평생 80년을 산다면 20년을 자는 것이 된다. 20년 동안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숫자 놀음을 했었는데, 아무 감각도 없이 너무 많이 9시간이나 잤다. 그런데 기분도 괜찮고 맑은 가을날이었다. 아, 오늘도 가을날이구나! 그것도 맑은 가을날이라니? 아내는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틀림없이 이웃들과 어울려 운동을 할 것이리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웃들과 운동을 했단다. 언제나 운동하는 것을 권하는 편이라 잘했다는 말과 함께 가을 나들이 이야기를 했다. 날씨도 좋은데 어디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고 싶냐는 눈치이다. 대충 갈 수 있는 곳은 매년 가을이면 찾는 단골 소풍지이다. 가을이면 언제나 등장하는 곳이 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을 가을이면 적어도 한 번씩 찾아가는 곳이 있다. 


은행잎과 붉은 사과가 멋진 부석사, 단풍이 숨을 멎게 하는 마곡사가 빠질 수 없다. 가을의 별미인 어리굴젓과 간월암이 일품인 간월도 그리고 안면도 솔밭이 기다리고 있다. 그 방향이면 세종시 영평사의 구절초 구경이 기대되는 곳이다. 남도의 맛과 정취가 엉켜있는 보성 차밭을 거쳐 벌교의 꼬막정식을 겸한 길도 제외될 수는 없다. 봄에도 좋지만 지금은 긴 장마에 슬픔을 안고 있을 법한 구례 섬진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맛과 멋을 품은 여행 길도 있다. 아내는 한참을 망설인다. 가을이면 한 번쯤은 가는 곳이지만 왠지 바쁜 일들이 겹쳐서 그러는 모양이다. 고민 끝에 소풍지가 결정되었다. 가을의 별미인 어리굴젓이 곁들여진 굴밥이 그리운 간월도였다. 시간이 허락하면 영평사 구절초 구경도 하고 싶단다. 

물에 갇힌 간월암

간월도를 향해 차를 몰고 출발했다. 두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길을 안내하는 네비아주머니는 언제나 고속도로를 고집하지만, 어깃장을 놓는 듯이 나는 시골길을 택한다. 시골길에는 볼 것이 있고, 또 느낄 것이 고속도로보다 많아 좋다. 길가에서 이것저것 살 수도 있고, 골골이 자리한 동네도 구경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조금은 널따란 길엔 평일인데도 차량들이 많다. 자전거를 타고 자주 드나드는 금강변에 접어들었다. 강가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아파트가 어느새 더 들어섰다. 하루가 다르게 밀집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도 아파트 값이 비싸단다. 훤하게 트였던 시야를 수많은 성냥갑이 가로막는다. 아름다운 산을 볼 수가 없고, 자유로운 눈길이 갈 곳이 없어졌다. 


저곳 중에는 고위 관리들의 집도 있단다. 공관으로 받은 아파트는 세를 놓아 돈을 벌고, 값이 오르면 팔아서 돈을 또 번단다. 그래서 출세를 하려고 엄마 찬스, 아빠 찬스를 필요한가 보다. 하지만 나는 쓸 수 있는 찬스도 없었고, 내 줄 찬스도 없어 이 번 세상은 글렀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떳떳하게 살아가는 큰 재산이 있어 더 든든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길은 언제나 한가롭고 평화스러웠지만 이제는 숨이 멎을 것 같은 풍경이 내내 아쉽기만 하다. 과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머릿속에는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물음을 하면서 운전을 한다. 


시골길에 접어 들어서자 가을이 가득히 왔다. 가득 영근 벼이삭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버티고 있다. 길가에 코스모스는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바람에 몸을 맡겨둔다. 멀리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누런 논을 따라 파도를 주면, 파도는 끝이 없이 가을 속을 달린다. 덩달아 먹거리에 정신없던 새들은 놀란 가슴 쓸어 담으며 하늘을 난다. 멀리에서 달려오던 푸른 구름은 달리기에 지쳤는지 그 자리에서 맴돈다. 하늘 속에 머문 구름은 모양도 다양하다. 손녀는 갖가지 동물을 대면서 신나는 재잘거림으로 즐거움을 주기도 했던 신비한 구름이다. 누런 들판을 보면 언제나 농부들의 신비가 생각난다. 서두르는 발걸음에 따라 들판의 색갈이 하루하루 달라지기 때문이다. 서둘러 달려간 서산 간척지인 AB지구에는 노란 물감으로 멱을 감았다. 


언제나 봐도 신비한 그림을 선사하는 가을날의 들판이다. 출렁이는 물결 따라 물결 박수를 치고, 박수가 지칠 무렵이면 떼새들이 맞장구를 친다. 하늘 높이 날아 올라 가을을 숨 쉬고, 다시 박수가 멎으면 지친 박수 속에 몸을 숨긴다. 끝없는 숨바꼭질을 구경삼아 달려간 간월도엔 물이 가득하다. 언제나 바닷물이 오간데 없어 할머니들이 앉아 있던 뻘밭이다. 하얀 수건 질끈 쓰신 할머니들이다. 작은 소쿠리 옆에 놓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하루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작은 돌을 손에 들고, 앙증맞은 손호미로 자디잔 굴을 얻는다. 할머니들의 작은 정성이 모아져 간월도의 어리굴젓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오는 길손 맞이하는 간월도 코스코스

간월도 어리굴젓은 간월도에서 참선수행을 하던 무학대사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고 하여 간월암(看月庵), 섬 이름을 간월도라 하였고, 굴 맛이 너무 좋아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하면서 간월도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생굴을 멀리까지 보낼 수 없어 발효시킨 것이 시초가 되었고, 여기에 고춧가루를 넣는 등, 입안이 얼얼한 어리굴젓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로부터 시골의 작은 할머니 손을 빌려 만들어지는 간월도 어리굴젓은 가을이면 대단한 입맛을 돋우는 멋진 가을 별미이다. 하얀 쌀밥을 한 술 뜨고, 빨갛게 치장 한 어리굴젓을 한 젓가락 얹는다. 고소한 참깨가 몇 방울 얹힌 얼리 굴젓을 얹어 입 안으로 들어오는 밥 한 술에는 가을이 가득한 가을날의 행복한 선물이다. 물이 가득 들어온 뻘밭은 잔잔한 물결이 평온한 가을을 선사한다. 자잘한 자갈을 몸에 담고,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살랑이는 물결은 잔잔한 설렘을 준다. 멀리서 물에 잠긴 간월암이 오랜만에 찾은 길손을 슬쩍 바라본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들어선 간월도 초입엔 붉은 코스모스 밭이 길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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