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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Nov 16. 2020

겨울이 오는 소리

(겨울 초입에 만난 어머니, 아이슬란드의 빙하)

기나긴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오는가 했는데, 벌써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문턱에 왔다. 산골짜기에서 오는 바람은 떨어진 낙엽을 몰고 오기도 하고, 세찬 바람이 집안으로 파고 들어오기도 한다.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산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이웃들의 보살핌 속에 채소를 가꾸고, 나물을 뜯으며 올해를 잘 보내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이웃집에는 겨울 준비를 하느라 오늘도 바쁘다. 참나무를 한 트럭 받아 장작을 패고, 창고에 쌓느라 오늘도 분주하다. 장작을 보일러에 넣어 방을 따스하게 데우려는 작업이 만만치 않은가 보다. 옛날에는 어떻게 추위를 피해 갔을까? 찬바람이 부는 시골집에서는 어떻게 겨울을 지났을까?


얼핏 어렸을 때의 시골집이 떠오른다. 시간이 나는 대로 나무를 해서 집 주변에 쌓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낙엽을 긁어 오시거나, 삭정이를 꺾어 부엌 나무 간에 가득 쌓아 놓는 일이다. 농사 일로 쉬는 날이 없었던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는 대로 산으로 향하신다. 하루에 한 짐 정도의 나무를 해 오셨다. 지게에 나무를 가득해서 지고 오시는 모습은 언제나 위대해 보이기도 했지만, 안쓰럽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일 년 내내 일을 놓을 수 없음이 불편해 보여서였다. 이렇게 나무를 해 놓으시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다. 


작은 부엌 쪽대문을 열고 나면 언제나 어머님이 앉아 계셨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연기 자욱한 부엌에서 무엇인가 하고 계신 것이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추운 새벽이다. 식구들은 밤새 식어버린 방바닥을 피해 이불속으로 몸을 감춘다. 이때, 어머니는 부스스 이불속을 나와 슬며시 문을 열고 나가신다. 그러고 그 추운 부엌에서 군불을 때야 식구들이 따스한 늦잠이라도 잘 수 있다. 물을 데워 놓아야 식구들이 따스한 물로 세수를 할 수 있다. 찬 물을 솥에 길어 넣고 연기가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렇게 추운 겨울바람도 개의치 않는 어머니였다. 


찬물을 붓고 불을 때야 방이 따스해지고, 식구들이 세수를 할 사이에 어머니는 밥을 하신다. 쌀을 씻고 솥에 넣어 다시 불을 때야 한다. 누구 하나 돕는 사람 없어도 야속하단 말이 없으시다. 묵묵히 불을 지펴 밥을 하시고 나면 남은 불씨를 화로에 담아 방안에 난로로 삼아야 한다. 화로에 담기 전엔, 그 불씨는 먹음직한 된장을 끓이는 불씨가 된다. 아궁이에 불덩이를 널따랗게 펼쳐 놓으신다. 쌀을 씻을 때 받아 놓은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파와 두부를 적당이 썰어 넣은 뚝배기를 얹어 놓는다. 가끔은 적당히 익은 깍두기나 김치에 넣은 무 조각을 적당히 썰어 넣으시기도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불에 올려진 뚝배기는 어쩔 줄을 모르고 끓어오른다. 부글부글 끓으면서 뚝배기에서 퍼져 나오는 된장 냄새는 이 세상의 어느 된장 맛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된장이 한참 끓여지고 남은 불씨는 화로에 담아 방안을 데우는 난로가 된다. 남은 불씨를 고무래로 긁어내어 부삽으로 뜬다. 부삽으로 뜬 불덩이를 화로에 넣고 방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신 어머니는 뜨거운 화로를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들어오신다. 그 위에는 부엌에서 끓여진 된장 뚝배기가 놓여 있다. 다시 그 위에 얹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된장 뚝배기는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


시뻘건 화롯불에 된장 뚝배기를 올려놓을 수 있는 삼발이를 눌러 놓는다. 그 위에 된장 뚝배기를 얹어 놓고 들여온 화롯불 위에는 천하에 제일가는 된장 뚝배기가 있다. 화롯불의 화력을 못 이기고 보글거리는 된장, 보글대는 된장의 소용돌이 속에 익어가는 파란 파와 두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먹음직스러운 네모난 두부와 가끔 보이는 시큼한 깍두기 조각은 대단한 식감을 주는 먹거리이다. 된장이 주는 맛은 뜨거우면서도 상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얼큰한 맛이 방안에 가득하다. 그렇게 된장이 다 끓여질 무렵, 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이제야 추운 부엌을 벗어나게 된다. 밥을 작은 그릇에 덜어 화롯불에서 부글거리는 된장을 한 숟가락 얹어 놓는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후후 불어 식힌 다음, 한입 가득히 넣는 그 맛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아랫목으로는 아버지와 어린것들이 앉고, 윗목으로는 어머님이 앉아 식사를 하신다. 왜 어머니는 맨날 윗목에만 앉으셨을까? 그것도 상이 아닌 작은 쟁반에 몇 가지의 반찬만 놓고 식사를 하신다. 젓가락도 없이 언제나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하신다. 젓가락은 손가락으로 대신하시며 대충 식사를 하신다. 오래도 아닌 잠깐만에 식사를 하시고 부엌으로 향하신다. 아직도 부엌 솥에 남아 있는 숭늉이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솥을 득득 긁어 큰 그릇에 담아오는 숭늉 맛은 또 어떠했는가? 구수하면서도 시원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밑바닥에 깔려 있는 눌은밥 맛은 또 어떠했는가? 가끔은 적당이 익은 누룽지가 멋진 맛을 주지만, 식사 대용으로 해야 하는 눌은밥이 언제나 대세이어야 했다. 추운 새벽부터 밥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는 왜 편안하게 식사 한번 하지 못했을까? 왜 그래도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을까? 우리는 그런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죄송하다는 마음을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이제야 생각해 보는 철부지의 생각이다. 


겨울 문턱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들려오는 소리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그만한 노력은 해야 한다. 지금은 힘들게 나무를 하거나, 불을 때는 어려움은 예전과 같지 않고 편리하다. 기름을 넣으면 방안이 훈훈하고, 아파트에선 반팔 차림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게 좋아진 세월에 느껴지는 된장 뚝배기의 맛은 왜 그럴까? 오래전, 어머님이 화롯불에서 끓여주던 맛은 왜 나오지 않을까? 음식을 만드는 솜씨도 좋아지고, 유명하다는 셰프들이 많은데도 그 맛은 없다. 장작 패는 소리가 오래전 어머님의 부엌을 추억해 주어 한참을 바라보며 겨울 초입을 서성인다.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오래 전의 어머니 된장 맛을 언제나 만나 볼 수 있을까를 쓸데없이 되뇌어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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