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벼락을 맞던 날, 라오스에서 만난 풍경)
생각하지도 않던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조용히 내리던 가을비가 갑자기 여름 비처럼 줄줄 내린다. 산 위에서부터 가을비가 오는 중에 느닷없이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이층 서재에서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볼 일이 있어 시내에 외출을 한 모양이다. 이층 서재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사이, 느닷없이 천둥소리가 난다. 동시에 아래층에서 들어보지도 못했던 괴상한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가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야 있을까라는 생각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을 했다. 오전에 할 일을 마치고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차를 몰고 나갔다.
시내에서 이런저런 일을 마치고, 아내와 만나 언제나처럼 수채화를 그리러 화실에 들렀다. 화실에서 두어 시간 그림을 그리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10시가 되어서였다. 부엌에 들어간 아내가 깜짝 놀란다. 냉장고에 전기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전기에 문외한인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이리저리 전기선을 바꾸어 봐도 소식이 없다. 밤 10시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떠 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냉장고를 산 회사의 AS센터에 전화를 했다. 늦은 시간이라 망설이다가 냉장고 안에서 아우성치는 음식을 생각해 전화를 했다.
언제나 냉장고가 꽉 차야 성이 풀리는 아내도 당황하는 눈초리다. 커다란 냉장고에 꽉 찬 음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쩔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눈치이다. AS센터 직원과 어렵게 연결이 되었다. 선택 버튼을 수없이 누르고 눌러 연결된 상담원, 다음 주 목요일이나 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일주일이 걸린다는 것이다. 참, 어이가 없다. 음식이 가득한 냉장고가 고장 났는데 그것을 고치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화가 났지만 참아가면서 음식물이 상하면 배상을 받을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방법이 있다면서 읽어주는 약관의 내용은 듣는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철없는 아이가 책을 읽듯이 읽어 나간다. 한참을 듣고 나서, 다른 방법은 없을까라는 말과 함께 일주일이 지나면 냉장고에 저장된 음식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자 다른 방법이 없단다. 내일 다시 알아봐서 연락을 해준단다.
거대한 전자회사의 AS 담당 직원의 대답이 참, 무책임하다. 물건을 팔 때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다 해놓고 고장이 났다는 말에 일주일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냉장고 문짝에는 10년간 무상수리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할 수 없이 김치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밖으로 내놓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김치냉장고에 넣는 수고를 두 시간 동안 했다. 김치는 문밖에 내놓고 안녕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이 되어 열 시가 되자 AS센터 직원한테 전화가 왔다. 직원이 지금 방문한다는 전화다. 아내와 함께 이제는 해결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맞이한 AS업체 직원은 냉장고가 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벼락을 맞았다고? 옛 어르신들이 베락을 맞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그러면 어제 천둥번개가 칠 때 난 그 소리가 냉장고에서 난 소리란 말인가?
천둥과 번개 그리고 벼락이 무엇이더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그것인 것 같기도 하다. 번개는 공기 중에 있는 전하가 구름에서 구름으로 이동하거나 또는 구름에서 땅으로, 구름에서 바다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한단다. 이때 구름에서 땅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벼락이라고 하며, 번개가 칠 때 나는 소리를 천둥이라 하는 것이다.
번개가 지나는 길은 온도가 높아져 공기가 급격이 팽창하면서 내는 소리가 천둥소리인데, 폭탄이 터지듯이 엄청난 소리가 그 소리란다. 이 벼락이 우리 냉장고를 방문했다는 직원의 설명이다. 나는 직원이 부품을 가지고 방문했으니 바로 수리가 되는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부분이 고장 났는지 알아보려고 왔단다.
그러면 언제나 수리 가능한가를 물었다. 지금은 부품이 없기도 하고 주말이 끼어 있어 월요일이나 가능하단다. 참, AS를 담당하고 있는 대기업의 행태이다. 분통이 터져 화를 냈다.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음식이 상해 나자빠져도 그 기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3일을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제 직원보다는 좀 빨라진 편이지만, 그동안 음식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응급조치 방법도 없어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왜 그렇게 늦느냐는 질문에, 부품이 멀리 창원에서 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창원에 내려가서 가져올 테니 장소만 알려달라는 말엔,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오후에 전화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직원은 가버렸다.
부엌은 그냥 난장판이 되어 있다. 냉장고는 전기선 때문에 앞으로 나와 있고, 각종 음식들이 너절하게 놓여 있다. 며칠 전에 해 놓은 김장은 밖에 그대로 쌓여 있다. 이삿집을 방불케 하는 집이 되어 어수선하다. 한참을 기다리는 중, 늦은 오후가 되어 전화가 왔다. 부품을 구했다는 것이다. 말없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기다렸다. 먼저 왔던 직원이 부품을 가지고 왔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느냐는 말에 이웃 도시에 있는 부품을 배송해 왔다는 것이다. 얼른 고맙다는 말을 하며 냉장고가 수리되길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냉장고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부품값과 출장비는 내야 한다는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 붙어 있는 10년 무상수리라는 문구를 가리키자 이 부품은 제외라는 것이다. 참, 할 말이 없다. 그들 마음대로 무상수리 부품을 정해 놓았으니 소비자야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어제저녁부터 전화를 받은 직원이 일주일 기다리라는 말 대신, 최선을 다해서 수리해 주겠다는 말은 왜 안 했을까? 굳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왜 했을까? 그리도 고지식하고도 성의 없는 대답을 해야만 했을까? 일주일 걸린다는 냉장고 수리가 하루 만에 수리되었다. 아내는 우리가 서둘러 다그치자 일찍 수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있을 수가 있는가? 참고 기다리면 일주일이 걸리고, 화를 내고 다그치면 하루 만에 해결이 된단 말인가? 찾아와 수리를 해 준 직원에게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다행히도 그럴만한 사정을 이해한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렇게 많은 부를 축척하고 있는 대기업에서 물건을 팔 때와는 달리 고객을 대하는 입장이 다르다. 누구를 믿고 물건을 사야 하는가? 조금은 화가 났지만 벼락을 맞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생각에 하루 일을 잊고 말아야겠다. 그렇게 냉장고도 벼락을 맞았고, 나도 날 벼락을 맞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