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Dec 12. 2020

아버지의 꿈, 한 섬지기

(아버지의 추억)

한 마지기,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면적을 뜻하는 것으로 한자로는 두락이라고 한다.  ' 말[斗]'과 '짓기'의 합성된 표현이다. 두락이란, 두(斗)와 씨를 뿌린다는 낙종(落種)에서 두와 락이 합해 나온 표현이다. 한 섬의 크기는 한말의 20배라고 하니 한 섬지기는 20마지기, 따라서 약 4,000평의 땅에 농사짓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적 이야기이다. 자그마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시골 동네는 농사지을 토지는 부족하지만, 바글바글한 초가지붕이 가득한 동네였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먹고살기가 힘겨웠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과 밭에서 하루를 보내는 고단한 시절 이야기이다. 자그마한 소농이었던 아버지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릴 궁리에 늘 바쁜 하루살이가 계속되었다. 대략 농토는 십여 마지기의 논으로, 중농에 해당하지만 늘 부족한 살림살이에 팍팍한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재혼을 하신 할아버지는 재혼으로 얻은 삼촌과 함께 사셨다. 이웃에 살고 계셨던 작은 할머니는 만만치 않은 성격으로 늘 어머니와 말다툼이 잦으셨다. 이유는 간단했다. 늘 할아버지의 농사짓기가 우선으로 이루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지 늘, 할아버지의 농사를 우선으로 돌보고 우리 것을 해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농사 거리보다는 형편없이 적었던 농토를 경작하신 아버지는 불평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다. 어머니는 활달하신 성격으로 그것을 다 수용하지 않으셨다. 각자 살림을 꾸려나가는 처지에 언제나 할아버지 댁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루하루의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말없이 묵묵히 농사일에 전념하시었다. 논과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거두는 일이 쉬울 수가 있겠는가? 모두가 등짐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이웃과 품앗이를 해가면서 무던히도 그 어려운 농사일을 해내시었다. 그렇게 얻어진 살림을 알뜰히도 모아 농토를 불리려 밤과 낮을 가리지 않으셨다.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시절이기에 자그마한 시골살이에서 농토를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아버지는 작은 돈을 아끼시어 서서히 농토를 늘려나가시곤 했다. 한 마지기, 한 마지기 땅을 구입하면서 하시는 말씀 중에는 늘 한 섬지기라는 말이 섞여 있었다. 한 섬지기? 동네에서 한 섬지기의 농사를 짓는 사람은 대개는 부자인 사람으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 섬지기란 한 마지기의 20배 정도이니 20마지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 마지기가 200평 정도이니 대략 4,000평을 뜻하는 것이리라. 동네에서도 한 섬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는 집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는 할아버지도 있는 듯했고, 시골 동네에 서너 집 정도로 기억이 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집들은 늘 머슴이라는 일꾼을 상주시키면서 농사를 지었다. 지금이나 오래 전이나 돈의 논리가 통했던 것은 동일했는가 보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농사 거리로 늘 바쁘기만 한 시골의 작은 농사꾼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늘 논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얼마의 돈이 있어야 아버지의 원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늘 가슴속에만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아버지가 땅을 다섯 마지기를 사셨다.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구입한 다섯 마지기, 1,000평을 구입하신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땅을 내가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논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그것에 대해 어떤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을 해 주신 것이었다.


부모님과 가까이 생활하면서 서서히 논의 넓이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어 갔다. 재산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고, 부모님의 원을 풀어드리려면 얼마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해 드리고 싶었다.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받으면 아버지께 전부 드렸다. 봉투째로 드리고 용돈을 받아서 썼다.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은연중에 아버지의 원을 풀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서였다. 내가 받은 정도로 해 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땅을 사지 않으시고, 드린 돈을 모아 되돌려 주셨다. 내 돈에 더해서, 땅 다섯 마지기, 1,000평을 더 주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섬이라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았으나 땅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논에 대한 애착이 나에게로 전해진 듯했다. 부모님의 재산에 관한 생각이 나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돈이 모아지면 자그마한 땅을 사면서 나도 모르게 뿌듯해짐을 알게 되었다. 땅을 구입해 그것이 얼마가 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과 살아오면서 재산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형성이 된 듯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 섬지기의 꿈을 이루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직도 아버지가 주신 다섯 마지기가 있어 가을이면 수확한 쌀을 아이들에게 주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한 섬지기의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