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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Dec 27. 2020

아버지의 침묵, 한참 후에야 그 뜻을  알았다.

(아버지의 추억과 나,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본인 촬영)

오래전, 윗사람과 술을 한 잔 하자고 했을 때 윗사람은 정중하게 술자리를 사양했다.

술자리는 젊은 친구 여럿이 함께 하려는 자리였다. 그런데 윗사람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것도 여러 번 사양했다. 결국은 그 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늘 궁금했었다. 왜 술자리를 거절했을까?


아버지는 늘 농사일에 허리 펼 틈이 없으셨다.

자그마한 농사 거리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말씀이 없으셨다.

언제나 하시는 일만 하시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만 드시는 것으로 끝이었다.

가끔 필요한 말씀만 하실 뿐이다. 오늘은 장에 갔다 오겠다든가, 아니면 들에 간다는 말씀뿐이셨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리 말씀 없이 과묵하셨을까?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가 윗사람의 위치가 되어 봤었고, 내가 아버지의 연세가 되었다.

차츰 가슴에 있던 의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가졌던 의문을 이해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아둔한지는 알았지만 아둔해도 너무 아둔했었다. 왜 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몇 해전, 계약 건으로 젊은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편한 문제가 아니고 계약 건 때문에 불편한 말이 오가고 있을 때 젊은이가 말을 한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생각하지 말란다.

나이가 많다고 여기서 어떤 어드밴티지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표시를 낸 것도 아니고,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젊은이는 말한다. 나이에 대한 어드밴티지는 없어졌다고.

이제는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기 쉽지 않다.

피곤한 젊은이가 앉아 쉬기도 하고, 휴대폰도 검색한다.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오래전엔 자리 양보가 당연한 일인 것 같았지만,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 잘못하면 망신을 당할 수 있다.

담배 피우는 어린 학생들을 혼을 내서 보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주변엔 아이들한테 폭행을 당해 입원한 사람도 있다. 아이 하나를 온 동네 사람이 키운다는 말은 잊은 지 오래되었다.


혹시, 윗사람은 술자리에서 불편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젊은 친구들하고 술 한잔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 생각한 것은 나의 생각이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분위기가 되면 난감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걸까? 

같이 싸울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다. 그러니 미리 자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듯도 했나 싶다. 

괜히 술 한잔 하려다 어른으로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위 사람으로서의 처신,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처신에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늘 집안일을 하시면서, 대략의 일들을 꿰뚫고 계셨다. 이 일은 어떻게 하고, 저 일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다. 하지만, 철부지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달면서 생각을 달리했다. 오랜 경험으로 얻어진 일들을 이야기해도 그대로 듣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것도 불손함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생각하셨을 것이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할까?

다시 이야기해서 내 말대로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자식들과 사소한 일로 언성이 높아지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불편함만 쌓이는 것 아닌가? 그럼 그만둘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을 것 같다. 

옳은 말을 해도 얼른 수긍하지 않는 자식들, 또 말을 하면 불편함만 쌓이고 말 것이다.

불편함만 생기는 것보다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심 끝에 아버지는 결심을 한다. 내가 가능하면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옳은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으면 불편하기만 하다. 쓸데없는듯한 이야기보단 침묵만이 가정을 위해 좋은 방법인 듯했으리라.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냥 들어드리면 안 됐을까? 어른이 하시는 '어른 말씀'인데.

많은 세월을 겪고 나서야 그 뜻을 헤아렸다. 오랜 경험과 깊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을 거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후로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먼저 뜻을 헤아리며 그 뜻을 알려고 했다. 왜 이런 생각을 미리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세월을 마냥 기다리시지 못했으니 말이다. 참, 우둔한 철부지가 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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