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용 엄니를 만났다.

(오래 전의 전원일기, 아프리카 짐바브웨)

by 바람마냥

오랜만에 오래된 드라마 '전원일기'를 만났다. 지금도 방영을 해주는 곳이 있어 신기했다. 드라마를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전원일기를 끝으로 드라마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가끔 만나는 드라마 내용이 불편해서이기보단 시간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이다. 요즘 대세인 트로트를 이야기하고, 드라마 이야기하는 모습에 낯선 이방인이 되어 불편할 때도 있다. 아는 지인이 텔레비전 없이 살아간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기도 한 사람이다. 가끔, 여행에 관한 이야기 또는 스포츠에 관해서만 넉넉한 사람이다. 나의 삶도 복잡한데 남의 삶까지 들여다볼 짬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 일용엄니는 왜 반가웠을까? 왜 웃음이 절로 번지는 얼굴이 되어 아내의 웃음거리가 되었을까? 텔레비전을 보고 웃는 얼굴을 본 아내가 하는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즐거우냐고..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왜 웃음이 절로 나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거기엔 정이 있었고, 모두가 참고 믿어주는 가족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두고 아옹다옹하는 시대, 너와 내가 나뉘어야 하는 시대, 내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시대에 살아감의 반전이 아닐까?


며칠 전 시골에 계시는 형님이 전화를 하셨다. 가을철에 말려놓은 시래기를 갖다 먹으라는 것이다. 시골까지는 40km가 되니 그야말로 백리 길이다. 아내와 함께 한 줌의 시래기를 가지러 출발했다. 백 리 길을 한 줌의 시래기를 가지러 가는 길이다. 마트에 가면 몇 천 원이면 족한 시래기 한 줌이다. 왜 그 길을 택했을까? 오래 전의 그리운 정을 찾아 오늘도 백리 길을 나선 것이다. 형님이라고 시래기 한 줌 가격을 모르시겠는가? 가을부터 말려 놓은 시래기를 동생에게 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한 줌의 시래기를 가져가라 하신다.


여름에도 수시로 백리 길을 오간다. 상추가 자라면 상추를 한 줌 뜯으러 간다. 옥수수가 익을 철이면 옥수수 몇 개를 따러 또 나선다. 봄부터 상추를 기르려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신다. 옥수수 모종을 사다 밭에 심으신다. 수시로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면서 작은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여름까지 길러낸다. 푸르른 잎이 나오면 동생이 생각나는 것이다. 옥수수가 영글면 멀리 있는 동생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렇게 전화가 오면 마다하지 않고 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간다. 거기에 무슨 가격을 따지고 시간을 핑계 댈 수 있다던가? 거기에는 가감할 수 없는 그리운 가족의 정이 있을 뿐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정을 느낄 사이가 없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살아감이 팍팍한 세상을 코로나가 또 갈라놓고 말았다. 에미가 보고 싶어 오고, 집밥이 그리워 와야 하는 집엘 올 수가 없다. 그렇게 찾아 올 자식들도 길을 막혔다. 먹고 살아가기가 바빠서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그리고 아버지가 밭에 있으니 밭엘 찾아가는 자식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이 계시니 가는 곳이 집이었다. 허름한 집에 엄청난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시골집엔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정이 있고 그리움이 있기에 찾아가는 것뿐이다.


다시 만난, 일용엄니는 온갖 동네일에 참견한다. 그 속엔 어른에 대한 예의가 있고, 늙음에 대한 어드밴티지가 있다. 칼칼한 목소리로 옳고 그름을 판결하되 어딘가 숨겨있는 정스러움에 미워할 수가 없다. 참견하지 않아도 될 일, 몰라도 될 일이지만 또 팔을 걷고 나선다. 누구도 거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없는 살림살이이면서도 정을 나누고, 알뜰살뜰히 가족을 돌본다. 수시로 회장님 댁을 드나들며 참견을 하지만 차마 미워할 수가 없는 우리네 어머니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정을 불러내고, 그리움을 주는 일용엄니이다. 만면에 웃음을 띄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아내는 묻는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