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한계를 만나다, 몽골의 흡수골)
친구들과 어울려 2주 이상 배낭여행을 다녔다. 최초의 출발지가 그리스와 터키였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그리스에 도착하기까지 초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역할을 분담하여 차질이 없도록 부단히 노력했었다.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면 차근차근 여행 경로를 따라간다. 첫날은 어디서 무엇을 먹었고, 누가 음식에 투덜댔는지 기억한다. 식당의 모습과 잠자리 모습이 생각난다. 그것을 옮겨 적으며 나름대로 여행지 느낌을 기록으로 남긴다. 참, 신기한 기억력이고 암기력이었다. 여행 경로를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되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시골집 창고 열쇠를 찾아도 없다. 주머니에도 없고, 차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방에 있는 다른 열쇠를 찾아 창고로 갔다. 이게 웬일인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찾고 있던 열쇠가 창고 문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열쇠를 어느 곳에 두었는지 자꾸 잊어버린다. 주머니를 뒤지기도 하고, 차 안을 샅샅이 찾아보기도 한다. 그래도 찾을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생각해 낸 것이 열쇠를 두 개 만드는 것이었다. 집안에 하나를 두고, 차 안에 하나를 두는 것이다. 결국 가는 곳마다 열쇠가 있다. 가는 곳마다 열쇠가 있어 편리하고 찾을 염려가 없다.
띠 동갑이신 형님이 계신다. 어느 날 시골집에 열쇠가 문에 꽂혀있다. 형님께 전화로 열쇠 이야기를 설명했다. 형님은 그냥 웃고 마신다. 사정을 듣고 웃고 마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열쇠를 창고 문에 꽂아 놓고 말았다. 한참을 생각하며 세월의 흔적을 되뇐다. 가끔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묻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아파트 도로명이 생각나지 않고, 자동차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전화기 메모장을 열어 보아야 한다. 갑자기 암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다반사이다.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 기억력을 총동원해 본다. 한참의 노력 끝에 찾아낸 번호를 적어 놓는다. 하지만 어디에 적어 놓았는지를 알 수 없다. 대단했던 기억력이 야속하기만 하다. 기억력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수없이 많은 전화번호를 기억했고, 네비가 없을 때도 전국 여행을 다녔다. 조금은 고생스러웠지만 무난히 전국을 누볐다. 세계여행이 어려워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잔류물이 훨씬 많았다. 하나하나 찾아가던 골목이 기억되고, 씨름하며 주문하던 음식이 떠오른다. 유리창이 없던 버스에 올라 누비던 스리랑카 해변이 생생했었다. 그런데 엊그제는 창고에 열쇠를 꽂아 놓고 말았다.
창고 안에 귀중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창고라는 것을 표시할 문만 달아 놓은 곳이다. 창고가 잠겨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잠금표시이다. 창고문을 열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열 수 있다. 그런 창고에 꽂혀있는 열쇠를 보고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란 것은 누군가의 헛튼짓이 염려된 것이 아니었다. 열쇠를 꽂아 놓고 이곳저곳을 헤매던 나를 보고 놀란 것이다. 형님이 꽂아 놓은 열쇠를 보고 생각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열쇠를 문에 꽂아 놓고 그냥 가셨을까? 내가 그랬다. 창고에 열쇠를 꽂아 놓고 잊어버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인 것은 아니다. 벌써부터 그런 징조는 있어 왔다.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찾아다녔다. 자동차를 타러 가며 열쇠를 놓고 나간다. 할 수 없이 열쇠를 가지러 다시 들어가야 한다. 여행을 같이 다니는 친구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끈으로 묶어 배낭과 연결해 놓았다. 내가 뭐라고 지껄이자 이것이 훨씬 편하단다.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으니 너도 그렇게 하란다. 전화를 하려면 긴 줄이 출렁거린다. 열쇠를 꺼내도 늘어진 줄이 방해한다. 하지만 잃어버릴 이유는 없단다. 세월의 만든 흔적이고 훈장이기에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을 받아들이자는 친구의 말에 벌써 동의했다. 하는 수가 없었다.
친구 말에 벌써 동의를 했지만 아직은 망설인다. 기억력이 남아 있다는 시늉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는 '척'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너 정도가 아니라는 '척'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려다 열쇠를 창고문에 꽂아 놓고 말았다. 세월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부지런히 기억을 되살리려 오늘도 몸부림이다. 열쇠를 꽂아 놓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누가 세월을 이길 수 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