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랑 이야기
오래전, 고즈넉한 시골집 뒤에는 가느다란 도랑이 있었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 보면 조그마한 옹달샘이 있고, 그 위로는 언덕이 있어 찔레나무를 비롯한 많은 나무가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옹달샘은 둘레가 흙으로 둑을 이루며 둘러 싸여 있는데, 둑에는 아기자기한 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 옹달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 나오는데, 옹달샘 가운데에선 물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가운데로 물이 솟아오르며 고운 모래를 밀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작은 화산이 불을 뿜어내는 듯하고, 한가한 가재가 그 옆을 서성거리는 이유는 나른한 한때를 보내며 혹시나 하는 먹거리를 찾기 위함이었으리라.
작은 도랑에는 물이 흐르는 방향 따라 잡다한 풀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마니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봄철에 이르러 작은 싹이 옹달샘에서 흐르는 물을 먹고 자라고, 여름 즈음이 되면 흰색과 연분홍색이 뒤섞인 아름다운 꽃이 풍성하게 도랑을 꾸며 주었다.
봄이 깊어지면서 언덕 위에는 까칠한 두릅나무가 순을 내밀고, 쌉쌀한 향을 풍기는 쑥이 커가며 도랑 식구들은 훨씬 풍성해진다. 작은 우산을 연상시키던 머위는 어느새 넓어졌고, 근처에 터를 잡은 찔레나무가 하얀 솜털을 뒤집어쓴 싹을 내밀며 봄을 노래한다. 곳곳엔 파릇한 돌나물이 잔잔하게 싹을 틔워 푸름을 주고, 덩달아 돌미나리 파란 잎사귀가 돋아 구색을 맞춰주었다.
여름이 한창이면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뒷 도랑은 한층 풍성해지고, 해묵은 밤나무는 큰 덩치값을 하느라 하얀 꽃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덩달아 산골 벌은 다 모여들어 시끄러워지고, 언덕엔 푸르스름한 쑥이 키를 키우며 알싸한 향을 뿜어낸다. 키다리 망초꽃은 어느새 하얀 꽃을 피웠고, 잔잔한 꽃으로 무장한 도랑의 고마니 풀이 더욱 풍성해졌다.
여름 한나절 장마가 오면 성난 물줄기가 흙탕물로 으르렁대지만, 도랑가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들이 잔잔한 물줄기로 바꾸어 준다. 거대한 물줄기를 이기지 못한 풀들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머리가 돌아갔지만, 햇살이 찾아오고 바람이 불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는 되돌아오고 만다.
하얀 꽃이 가득하던 밤나무는 어느새 흰털을 다 털어냈고, 그 자리엔 작은 밤송이가 자리 잡았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밤송이는 그네를 타고, 극성맞은 여름 비와 바람을 이기고 그예 몸집을 키워 가을을 맞는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밤나무는 제법 그럴듯하게 모양이 변한다. 작았던 밤송이는 주먹만 하게 커지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녁이면 넉넉한 알밤을 쏟아내고야 만다.
가을이 깊어 밤송이가 입을 벌려 알밤을 물고 있으면, 어느새 찾아온 바람이 그냥 두지 않으니 도랑은 알밤으로 그득해진다. 수북한 고마니 풀을 뒤집고, 쑥 더미를 헤집으며 찾아낸 알밤은 언제나 신나는 주전부리 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밤나무도 내줄 것을 모두 주어 홀가분하고, 흐르던 도랑물도 어느덧 잦아들면 도랑은 서서히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고마니 풀도 어느새 풀이 죽어 시름이 가득하고, 무성하던 찔레나무도 꽃을 지웠다.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면 밤나무는 쓸쓸히 낙엽을 떨구고, 도랑 가족은 서서히 겨울을 준비하다. 하지만 끝없이 흘러내리는 옹달샘 물은 아직도 그칠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 흘러도 떠나온 도랑은 아직도 여전하고 오래전 도랑 식구들은 가득하지만, 누구 하나 찾는 이 없어 도랑의 허전함은 메울 수 없다. 흘러내린 흙으로 메워지고, 굴러온 돌마저 가득해 이리저리 물길을 바뀌어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래전 밤꽃 흐드러지게 피던 그 밤나무도 자취를 감추었고, 어슬렁거리던 가재도 찾을 수 없다.
오래전 아름다운 기억 찾으려 한가한 시골에 집을 하나 마련하였다. 앞마당 잔디밭을 지나 작은 도랑을 품은 새 집은, 옹알거리는 도랑 물소리가 그 기억을 찾아 내 주어 좋다. 끝없이 재잘대는 산새가 찾은 도랑엔 내려앉은 나뭇잎이 조각배 되어 흐르고, 갖가지 모양을 가진 조약돌은 흐른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의 흔적 지워지지 않고, 갖가지 푸름을 안고 있는 도랑 식구들이 오래전 기억을 되새겨 준다. 한 겨울 속에서도 밤새도록 갈갈대는 물소리는 한가한 시골집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게 한다.
아침 햇살이 도랑에 비추면 물에 젖은 자갈이 빛을 발하고, 푸름을 먹은 식구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지는 햇살이 도랑에 길게 비추면 돌 틈 사이 반짝이다 남은 그 빛이 시골집에 닿아 좋다. 이제 겨울이 더 깊어 얼음 가득해지면, 그 속에서 들리는 물소리 더 아련해지리라. 추위가 찾아와 얼음이 두터워져도, 들려오는 얼음 속 봄 소리에 맞춰 서서히 봄 준비하며 작은 도랑 속은 더 분주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