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에도 삶의 이야기가 많다.

(새벽 자전거 길, 푸름 속 들판)

by 바람마냥

창문을 열자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창문 앞 동산이 뽀얀 안개를 가득히 쓰고 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나서기로 했다. 서둘러 옷을 입고 안장에 올랐다. 동네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기 전에 나서야 덜 미안하다. 동네를 막 벗어나려는데 주민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봄부터 소중히 길러온 고랭지 배추를 출하하는 날인가 보다. 대형 트럭들이 밭 가장자리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일터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얼른 페달을 밟아 안갯속으로 숨어 버렸다. 미안한 생각에 힘차게 굴러보지만 눈길을 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덜 미안한 생각에 근육의 힘을 믿어본다.


간신히 눈길에서 벗어나자 푸름이 가득한 논길이 나온다. 어디를 가나 포장이 되어 있어 시골 구석구석을 갈 수 있다.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시골 동네를 지나는 기분이 상큼하다. 언제 우리도 잘 살 수 있을까를 궁금해했는데 벌써 그런 시절이 온 기분 때문이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두 세대 서있고, 논길과 밭두렁에 트럭들이 열을 서서 대기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하는 모습들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만났다. 아껴둔 근육의 힘을 빌려본다. 갑자기 불러온 근육도 힘이 드는가 보다. 간신히 한 고개를 넘어가자 긴 비탈길이 나온다. 삶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이곳저곳을 바라본다.

IMG_8336[1].JPG 벚꽃길이 푸름으로 변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들판을 서성인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줄 푸름이 가득하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검은 푸름으로 옷을 갈아 입혔다. 순식간에 변한 농촌 모습이다. 텃밭에선 모녀가 무슨 일인가 하고 있다. 일찍 일어나 엄마를 도와주는 젊은이가 고맙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이불속에서 있을 시간에 엄마의 손길을 도와주러 잠옷 바람에 나온 것이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한참을 내려가자 제법 큰 냇물을 만났다. 넉넉한 물이 흘러 많은 새들이 먹이를 찾느라 바쁘다. 바쁘게 물속을 넘나드는 오리가 있는가 하면,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두루미도 보인다. 먼산을 바라보는 여유인지 사방을 경계하는 눈초리인지 알 수는 없다. 먹이를 찾으려는지 유유히 발걸음을 옮긴다.


바쁘게 페달을 밟아 도착한 자그마한 면소재지, 있을 것은 다 있는 곳이다. 자전거길에 찾아가는 커피집은 문을 닫았다. 엊저녁에 피곤했는지 이른 시간이지만 문을 닫았다. 조그마한 면소재지에 커피집이 대여섯 군데는 된다. 몫이 좋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손님을 기다린다. 사람의 사는 모습이 순식간에 변한다는 생각이다. 안장에 올라 다른 커피점을 찾았다. 새마을이란 간판을 건 커피집이다. 시골스런 이름에 불이 켜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척이 없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더니 기어이 대답을 한다. 커피를 마시려면 5분을 기다리고 바쁘면 그냥 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다. 이른 아침이니 5분쯤은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난리가 났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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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내다보니 소나기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진다. 서둘러 자전거를 처마 밑에 들여놓고 커피점으로 들어섰다. 중년의 여사장이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커피를 달라한 사람이냐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에 갑자기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불렀다는 것이다.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지만 바쁘면 문을 열지 않았으면 되었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이에 동네 사람인 듯한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다란 컵에 배가 부를 정도로 커피가 가득하다. 이웃에게는 호의를 베푸는가 보다 하면서 커피를 주문하며 시럽을 넣어 달라했다.


시럽을 몇 번이나 넣느냐는 질문에 서너 번 넣으라고 하자 깜짝 놀란다. 나를 바라보면서 설탕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낫겠단다. 자기가 내린 커피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가 보다. 할 수없이 두 번으로 양보를 하고 커피를 받았다. 이웃주민에게 베푼 아량이 나에게는 없는가 보다. 커피를 챙겨 나오자 아침 먹을 것이 걱정인데 비는 그치지 않았다. 어쩔까를 망설이다 처마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점차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햇살이 찾아왔다. 하늘의 조화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자전거를 챙겨 아침 먹거리를 찾으러 나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집이 보인다. 맛있는 만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 여자 사장이 말을 건다. 비를 어떻게 피했느냐고 묻는다. 무심히 만두만 건네는 것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IMG_8337[1].JPG 길가에서 금계국을 만났다.

널따란 들판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곳곳에 모를 심은지 오래되어 제법 자리를 잡았다. 검푸름이 논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고, 곳곳에 농부들이 논두렁을 정리하고 있다. 물고를 보는 농부도, 풀을 깎는 농부도 한결 한가해진 느낌이다. 곳곳에 벼를 심지 않은 논도 눈에 뜨인다. 농사를 짓던 노인들이 손길을 얻을 수 없었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가지런히 정리된 논에는 모가 자리를 잡았지만, 괜한 산을 깎아내리는 모습엔 불편하기도 하다. 푸르른 나무가 자라려면 긴 세월이 걸릴 텐데 그 세월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이다. 모조리 깎아내린 산은 붉은 상처를 드러내고 말을 잊은 듯하다. 어떻게 해야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인간의 오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으로 발길이 무겁다. 널따란 들판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정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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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런 성찬을 차려야겠다. 새벽부터 긴 발걸음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하고, 푸르른 들판에서 맑은 공기 맛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구한 커피 한잔과 만두 몇 개 그리고 아내가 싸준 빵이 한 개다. 더 바랄 것도 없는 아침이지만 이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침이다. 맑은 햇살이 있고 푸르른 들판이 있다. 뒤로는 맑은 시냇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고 있다. 자그마한 정자에 홀로 앉아 거대한 대자연을 끌어안고 있다. 거기에 성찬을 차려놓고 성스런 아침을 맞이한다. 언제까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 일까? 문득 아침에 드는 생각이다. 지난봄에 만났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정자 근처 작은 밭에 채소를 가꾸던 할머니가 계셨다. 가지고 온 사과를 나누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할머니가 바쁘신가 오늘은 오시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사신다고 자랑을 하신 할머니가 안녕하신지 궁금하기도 하다. 누가 있으면 물어볼 수도 있지만 지나는 사람도 없다. 매칼없이 동네 개들만이 하늘 보며 짖고 있다. 길가의 어느 집은 지붕마저 망가졌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이 살아가기 바쁜가 보다. 집이 무너지도록 발걸음을 하지 않았음에 궁금한 아침이다. 세월의 흐름이 왜 이렇게도 빠른지 모르겠다. 멀쩡하던 집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알밤을 쏟아내던 밤나무는 한 해를 보내고 또 푸르른 잎을 키웠다. 작은 밤송이가 푸르름 속에 너울대는 아침이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나온 아침, 이런저런 생각에 고요한 들판 한가운데로 페달을 밟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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