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에 하얀 밤꽃은 또 피었다.

(밤꽃을 보면서)

by 바람마냥

아침, 창문을 열고 바라본 앞산이 훤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밤꽃이 활짝 핀 것이다. 밤나무 가득히 밤꽃이 피었다. 하얗지도 않고 노랗지도 않은 빛깔에 햇살이 비추는 모습이 너무나 싱그럽다. 어떻게 저런 빛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자연의 신비함에 넋을 놓고 바라본다. 하얀 시루떡에 묻은 하얀 듯한 팥고물 색, 흰색에 연한 노랑이 섞인 듯한 색이다. 여기에 밝은 햇살이 찾아왔다. 더불어 산 꼭대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갈래 머리처럼 치렁대는 밤꽃이 바람에 너울거린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밤꽃 냄새가 도랑을 넘어온다. 이내 잔디밭을 건너 창문을 넘어왔다. 봄을 맞아 작은 싹을 내밀었던 밤나무였다. 지난가을 그 많은 알밤을 쏟아 주었던 밤나무이다. 동네 사람들이 좋아했고 산 식구들의 식량이었던 알밤이었다. 알량한 욕심에 산 식구들의 식량을 뺏는 것 같아 늘 미안했었다. 꽃과 열매, 일 년 내 받기만 하고 무심해했던 밤나무였다. 밤나무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또 보답을 하려는지 꽃을 피운 것이다. 어쩐지 고마운 밤나무를 무시한 듯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자그마한 앞동산이지만 많은 나무들이 있다. 크게는 꺽다리 낙엽송이 가장 많고, 곳곳에 소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비탈진 산에는 오랜 기간 쌓여온 낙엽이 두툼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다. 비탈 아래쪽으로 대여섯 그루, 그리고 산 중턱에도 여러 개의 밤나무가 있다. 이층 서재 앞산에서 보이는 대여섯 그루의 밤나무가 꽃을 가득 피우고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산 중턱에 있는 밤나무도 탐스런 꽃을 피웠다. 초여름 아카시나무처럼 맑은 색의 밤꽃이 이산 저산에 물들였다. 올해도 풍년이 올 징조인가 보다.


밤꽃이 피면 풍년이 든다 했으니 말이다. 밤꽃은 수분이 풍부하고 날씨가 맑아야 잘 핀다고 한다. 농사도 잘 될 수 있는 조건이니 풍년이 들 수밖에 없는가 보다. 탐스런 꽃에 황금색 들판을 연상케 해주는 꽃이니 얼마나 고마운 꽃인가? 고마운 꽃을 무심하게 보낸 삶은 무엇이 그리 만들었을까? 괜한 일거리를 만들어 다리 품만 팔며 사는 것이 아닌가 늘 후회를 하는 삶이었다. 이리저리 바쁜척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에 밤꽃이 흠뻑 피어난 것이다.

IMG_8127[1].JPG 하얗게 꽃을 피운 야광나무

봄부터 계절을 노래하는 많은 꽃들이 핀다. 아름다운 수많은 꽃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여자에 비유한다. 하지만 밤나무 꽃은 다르다. 밤나무 꽃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남자에 비유되는 꽃이 밤나무 꽃이다. 서양에서도 밤꽃 향기는 '남자의 향기'에 비유하고, 밤꽃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 때문에 남자의 향 같다 하여 양향(陽香)이라 부른다. 밤꽃과 남성의 정액에는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한다. 밤꽃이 피면 부끄러워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갈 정도로 남자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밤나무 꽃은 암수가 한그루에서 핀다. 수꽃이 햇가지에 수술 모양으로 꽃을 피우면 암꽃은 2~3송이씩 수꽃 밑 부분에서 핀다. 흔히 볼 수 있는 긴 수술 모양의 꽃은 수꽃으로 진한 향기는 수꽃에서 나는 냄새이다. 화려하지 않은 밤꽃이 진한 냄새를 통해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암꽃은 수꽃이 피고 난 후에 피는데 꿀은 암꽃에 있으며, 밤꿀은 진하고 향이 강하며 약성이 좋다고 한다. 신비한 자연의 조화이다. 수꽃이 냄새를 피워 벌과 나비를 모으고, 이내 암꽃에 이르러 열매를 맺는다. 암꽃은 이에 뒤질세라 꿀을 주고 있다. 밤꿀에는 다량의 페놀과 플라노이드 성분이 있어 근력강화와 기력을 회복해 주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꽃이 피고 대략 100일이 지나면 밤이 익기 시작하는데, 알밤을 얻기까지는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밤이 제대로 영글면 알밤을 까서 생으로 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하는 우리들의 주전부리 감이다. 여행지에 가면 입구에 반드시 등장하는 군밤, 긴긴 겨울밤을 달래주는 군밤이기도 하다. 알밥을 줍는 것도 힘들지만, 밤송이에서 밤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다. 겉으로는 가시로 무장을 했고, 갈색 껍질이 한 겹 두르고 있다. 껍질을 벗겨내면 얇고도 떫은 속 껍질이 한 겹을 싸고 있으니 고단함을 주는 밤이다. 온 산에 하얀 밤꽃이 가득하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앞산이다. 봄이 영글어가면서 벚꽃이 질 무렵, 찔레꽃과 아카시 꽃이 하얗게 피었었다. 코를 벌름거리게 했던 하얀 아카시 꽃이 하늘에 걸려 바람 그네를 탔었다. 깊은 향을 쏟아내던 아카시나무가 꽃을 떨구자 야광나무가 눈부시게 하얀 꽃을 피워 무심한 달빛에 빛을 발했다. 뻐꾸기 소리 따라 봄날이 저물어갈 무렵에 밤꽃 세상이 된 것이다. 진한 밤꽃 향이 앞산을 가득 덮었다. 곳곳에 꽃을 피우며 벌과 나비를 모으고 있다. 많은 것을 내주었던 밤나무가 다시 꽃을 피운 것이다. 신기한 계절의 순리를 보는 듯한 앞산이다. 하얗게 물들인 밤나무가 밝은 햇살에 유난히 빛나는 시골 동네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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