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을 보면서, 꽃을 피운 나무수국)
오래 전, 조용한 초가집을 돌아가면 돌 언덕이 있었다. 돌 틈에 푸르른 이끼가 자리를 잡았고, 그 사이에 돌나물이 파릇하게 커가고 있었다. 봄을 알려주는 시골집 풍경이다. 돌을 쌓아 만든 언덕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무, 나무수국이었다. 어머니는 수국을 좋아하셨다. 돌담 밑으로 채송화와 백일홍을 심었고, 장독대 둘레에도 봉숭아를 심고 나리꽃도 심었다. 계절 따라 곳곳에 피는 꽃들이 아름답기만 했는데, 여름 들어 피어나는 수국의 품위는 당할 수가 없었다. 하얀 꽃으로 분장을 한 하얀 수국, 탐스럽기도 하고 복스럽기도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봄이 되면서 몇해전 터를 잡은 시골집 앞마당에 있는 수국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끔 봄비가 찾아오고 햇살이 오가면서 수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스멀스멀 꽃봉오리가 올라오더니 봄이 끝날 즈음 하얀 꽃을 피웠다. 하얀 꽃으로 계절을 알렸던 앞뜰 수국과는 달리 뒤뜰에 있는 나무수국은 반응이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도록 게으름을 피우던 뒤뜰 수국이 여름을 알았나 보다. 얼마 전부터 꿈틀거리던 나무수국이 푸르른 꽃잎을 내밀었다. 언제나 꽃을 피우려나 궁금했지만 무심한 수국은 응답이 없었다. 어느 날 나무수국이 하얀 꽃을 피워냈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만나 계절을 알아 채린 모양이다.
수국(水菊), 학명은 Hydrangea macrophylla으로, Hydrangea는 그리스어로 물을 뜻하고, macrophylla는 작다는 의미이니 작은 꽃들이 모인 물을 좋아하는 꽃이라는 뜻이다. 백거이는 보랏빛 태양이란 뜻의 자양화(紫陽花)라 하였고, 색이 변한다 하여 팔선화(八仙花), 칠변화(七變花)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중국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이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둥근 꽃이라는 뜻이다. 수국(水菊)은 물을 좋아하는 국화를 닮은 풍성한 꽃이니 학명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같은 꽃을 두고도 보는 시각이 다름을 알 수 있는 수국이다.
수국을 보면서 생각은 물과 관련이 된 꽃이려니 했었다. 학명이나 수국(水菊)으로 보면 맞는 생각이었고, 수구화(繡毬花)로 보면 틀린 생각이었다. Hydrangea이 물을 뜻한다고 하니 Hydrangea이나 수국(水菊)은 꽃의 생태를 보고 정한 것이었고, 수구화(繡毬花)는 꽃 모양을 보고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하는 식물로 특히 꽃이 피어 있는 동안에 물이 부족하면 꽃이 시들거나 말라 버린다. 수국은 중국이 원산지이지만 일본에서 개량되어 원예품종으로 만들었단다. 개량된 수국은 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 슬픈 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개량한 관상용 수국은 산수국의 꽃 부분을 퇴화시켜 풍성하게 피도록 한 것으로, 유성화는 없애고 무성화만 남게 한 것이란다. 우리나라 자생종인 산수국은 종자로 번식하지만, 거세된 수국은 혼자서는 번식할 수 없다고 한다. 번식을 위해선 가지나 줄기를 꺾어 삽목을 하거나 휘어진 줄기를 땅에 묻는 방법을 이용해야 번식이 가능한 꽃이다. 수국은 화단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꽃 중에 하나지만, 암술과 수술이 퇴화되어 수정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아름답지만 조금은 슬픔을 안고 있는 꽃이기도 하다. 수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보여주기 위해 기꺼이 꽃을 피워주고,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음이 고맙기만 하다.
토양의 성분에 따라 중성이면 하얀색 꽃을 피우지만, 산성이면 청보라 색으로, 알칼리성이면 붉은빛의 꽃을 피운단다. 따라서 같은 밭에서도 토질에 따라 다양한 색을 얻을 수 있고, 한 그루에서도 뿌리의 길이나 수분의 흡수 양, 시간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산성이냐 알칼리성이냐에 따라 꽃의 색이 달라지므로 퇴비의 양을 조절해서 색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고 한다. 파란 수국이라도 계란 껍데기를 갈아 넣으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백반을 묻어 주면 푸르게 변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자연의 삶을 인간의 기호에 따라 변질시킴에 잔인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수국의 매력이기도 하다.
수국은 작은 꽃들이 많이 모여 하나의 꽃을 완성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잔잔한 작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탐스런 꽃을 이루는 푸근한 꽃이다. 게으름을 피우던 뒤뜰 수국이 꽃을 피우며 장마를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 만난 뒤뜰 수국이 안타까웠다. 밤새 물을 가득 먹고 가지가 늘어져 있다. 좋아하는 물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장맛비였다. 감당할 수도 없는 많은 꽃봉오리를 후회하고 있는 듯하다. 여러 송이 꽃을 피운 가지가 땅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넘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인 것이다. 어렵게 피운 꽃에 좋아하는 물을 가득 먹어 가지가 버거웠나 보다. 지나침은 모자라지만 못함을 손수 보여주고 있다.
조심스레 가지를 들어 빗물을 털어 주었다. 그래도 힘겨운지 꽃잎을 같이 털어낸다. 물을 털고 일으켜 세우자 수국이 허리를 편다. 햇살이 찾아오고 바람이 불자 수국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쉬며 일어난다. 아직도 푸릇한 작은 꽃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이 더 다가오면 꽃을 피울 모양이다. 푸름과 하양을 띄고 있는 수국이 어두운 뒤뜰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다. 하얗게 핀 꽃 봉오리가 시들어도 푸릇한 작은 꽃들이 피어 여름 내내 잔디밭을 하얗게 비춰 줄 것이다. 오늘도 수국은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는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