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Oct 10. 2020

감나무엔 까치밥이 열렸다.

(아름다운 가을, 아이슬란드의 아침)

장맛비가 그친 여름날,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바람이 잘 통하는 대문 옆에 앉아 숙제를 한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쉼을 겸한 바느질을 하며 어린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문 밖 바깥 마당가엔 커다란 감나무가 오래된 나이가 힘겨운 듯 가운데 부분은 썩어 검은빛을 띠고, 축 늘어진 가지를 버티고 비스듬히 서 있다. 


가끔 불어주는 바람에 커다란 감나무가 흔들리면 푸른빛의 어린 감이 '딱' 소리를 내며 마당에 떨어진다. 아이는 누가 주워 갈세라 숙제하던 연필을 놓고 떨어진 감을 주우러 뛰어간다.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떨어진 감을 소금물에 하루 정도 우려내면 떫은맛은 없어지고, 먹을만한 감으로 태어나니 아이는 정신을 집중하며 떨어진 감을 모았다.   


초봄의 작은 햇살에 감나무 줄기를 뚫고 나온 잎이 연초록빛을 띠기 시작하면 초봄이 왔다는 신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감나무는 작은 잎새가 나무 크기에 비해 어울리지는 않지만, 연초록 잎이 귀엽고도 앙증스러운 맛을 전해 준다. 앙증스러운 잎이 서서히 커갈 무렵, 감꽃이 노란빛을 띠고 피기 시작하는데, 네 개의 잎을 울타리 삼아 암꽃과 수꽃이 핀다. 수꽃이 먼저 피어 나중에 지는데, 노란 암꽃이 수정이 되면 꽃이 떨어지고 녹색의 작은 감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생긴 감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과 비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감으로써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다 익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지는 것이 많이 있다. 이것을 모아 떫은맛을 우려내면 맛있는 주전부리가 되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주우러 새벽잠을 설치기도 한다. 아이도 여기에 동참을 하려 아침 일찍 일어나기도 하고, 여름날 엄마 옆에 앉아 숙제를 하면서도 감이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여름이 다가와 비가 오고 거센 바람이 불면 감나무는 더 많은 감을 쏟아내고 만다. 


수없이 많이 달린 감은 여름의 거센 바람을 이기고, 따가운 햇살을 넘기며 조그마한 감이 아기 주먹만 하게 커져 갔다. 감나무는 여름을 지나며 잎을 무성하게 자라나게 하여 어느덧 감잎이 감을 덮고 말았다. 여름 한나절 소나기 멈추고 햇살이 반짝이면 감나무 잎에 머물던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고요한 시골집을 깨워주고, 대지에 물방울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짓궂은 여름을 견디어 내고, 감잎에 싸였던 감이 가을빛을 받으며 자라나 어느덧 누런빛을 발하게 되면 벌써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다. 


서서히 찬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이 높아지면, 감은 서서히 영글어 발그레한 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때쯤이면 감나무 잎도 어느덧 누런빛으로 물들고, 섣부른 잎은 하나둘씩 대지의 품으로 안기게 된다. 가을 뙤약볕에 한껏 익어버린 감은 드문드문 붉은 홍시가 되어 밝은 빛으로 물들고, 가지마다 붉은 감들이 묵직하게 감나무를 힘겹게 한다. 아이는 어느덧 붉게 물든 홍시에 눈이 가고, 긴 장대를 들고 감나무 밑을 서성이며 혹시나 떨어진 홍시를 찾기에 바빠진다. 서서히 찬바람이 일고 서리가 내릴 즈음이 되면, 감나무는 붉은 감으로 치장을 하고 푸른 하늘 아래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아이는 감을 따는 장대를 메고 자그마한 망태기에 긴 줄을 달아 힘겹게 감나무를 올라가야 한다. 벌써 익은 홍시를 따서 한 입에 베어 물면 달큼하고도 푸짐한 내음이 한 입 가득하고, 머리 위에 매달린 붉은 감들이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적당한 감나무 가지에 몸을 의지하며 하나씩 감을 따서 망태기에 넣으면 순식간에 망태기가 묵직해진다. 망태기에 감이 가득해지면 긴 줄을 아래로 내려 감을 덜어 내고, 다시 망태기를 올려 감을 따기에 바쁘다. 


길고도 우람하게 자란 감나무는 여느 나무와는 다르게 사람이 오르내리기에는 너무 약하다. 따라서 감을 따면서도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나무가 부러져 큰일을 당하기 쉽다. 조심에 조심을 하면서 한나절의 고단함을 무릅쓰고 감을 따다 보면 감나무 끝에만 감이 달려 있고,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니 오늘도 감 따기의 마무리를 해야 한다. 광주리에 가득한 감을 안고 집으로 오면, 어머니는 적당히 데운 물에 옅은 소금물을 단지에 담아 아이가 따온 감을 담근다. 감을 담근 단지를 얇은 이불로 덮어 안방 구석에 모셔 놓으면, 이튿날이 되어 떫은맛은 없어지고 달큼한 감으로 변신을 한다. 


떫은맛이 우려진 달큼한 감은 추석 때가 되면 차례상에 오르는 것이요, 운동회가 오면 멋진 먹거리가 되는 것이었으니 아이는 감을 따는 날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감을 우려내면 멋진 주전부리 감이 되고, 남은 감은 껍질을 벗겨 곶감을 만들기도 한다. 따스한 햇살 비추는 곳에 앉아 감 껍질을 벗겨내고, 기다란 줄에 달아 가을 햇살에 말리면 식감이 좋고 달큼한 곶감이 된다. 곶감은 아이에게는 언제나 멋진 간식거리이고 주전부리였다. 곶감의 표면에 살짝 묻어나는 하얀 가루는 곶감을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분가루이고 입술을 허옇게 만드는 화장품이었다. 


이튿날 다시 나무에 올라 감을 따는 아이는 감 따는 것이 조금은 지루하고 고단함을 느끼지만 달큼한 감이 주는 맛에  참을 수가 있다. 한나절만에 나무에 올라 한 광주리의 감을 딴 것은 겨우내 간식거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어머니는 중간 크기의 단지에 감을 한 켜 넣은 후에 볏짚을 한 켜 놓고, 다시 감 한 켜에 짚을 한 켜 넣는 과정을 되풀이하여 한 단지가 되면 뒤의 광에 단지를 옮겨 놓는다. 겨울이 되면서 감은 찬기에 얼고, 다시 열기에 녹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감이 익고 숙성이 되어 겨울 한철의 멋진 먹거리가 된다. 얼음이 서린 감을 꺼내 한밤중에 하나씩 먹는 맛은 어느 것보다도 근사한 맛을 안겨주는 좋은 먹거리였다. 


아이는 낮은 부분에 달린 감은 땅에서 따고, 굵은 가지에 달린 것은 올라가서 땄지만, 꼭대기에 남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얼굴을 하늘 높이 들고 감을 따는 장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어쩔 수가 없는 감은 그대로 둔다. 하늘 높이 달린 감은 겨울 한나절 먹이가 없어 오고 가는 까치밥이 되고, 그래도 남은  빨갛게 물든 감이 겨우내 달려 있어 그것도 보기 좋은 구경거리였다. 감나무의 일 년은 아이에게 꿈을 주고 먹거리를 주는 좋은 친구였다. 또한 감나무는 여름내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우내 곶감과 얼음이 서린 얼음 감을 주는 오랜 친구였다. 그 감나무는 그리운 어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추억의 나무이면서, 오늘도 하늘 높이 달린 붉은 홍시는 지나는 까치의 멋진 먹거리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가을은 실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