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 자전거길, 돼지감자꽃)
시원한 바람을 가르고 비탈길을 내려간다. 저 마을로 가 볼까? 지난번에 이쪽 동네 구경을 했으니 한 번 가보자. 서둘러 페달을 밟으며 오른 언덕, 기다란 배추밭이 나온다. 유모차에 기대어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멀리서 배추밭을 돌보고 있다. 산짐승이 염려되어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 힘겹게 보이지만 잠시도 쉴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할머니는 먼발치에서 할아버지의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다. 비탈 밭이지만 비워 놓을 수가 없었나 보다. 얼마 되지 않아 풀밭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외진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에 알밤이 수북이 떨어져 있던 곳인데, 아직은 계절이 이른 듯하다. 언제쯤 오면 알밤 구경을 할 수 있을까? 괜한 생각에 산 짐승에 미안해진다. 먼 길을 돌아오는 길, 여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달맞이 꽃이 가득하던 곳에 도착했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근처 밭주인이 제초제를 뿌렸나 보다. 바짝 마른 달맞이꽃 줄기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쯤 꽃은 지고 씨를 달고 있어야 하는데 바짝 마른 줄기만 서 있다. 씁쓸함과 함께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며 얼른 길을 벗어났다. 자그마한 냇가가 나왔다.
어린 새끼를 데리고 나온 어미 오리가 보인다.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어미 오리는 바쁘기만 하다. 먹거리도 구해야 하고 새끼도 돌보아야 하는 어미 오리, 부산하게 몸을 움직인다. 새끼를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은 오리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다슬기를 잡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얼마나 잡았을까? 음식점을 하시는 분인가? 궁금함을 뒤로하고 들어선 들판엔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가을이 왔음을 실감 나게 한다. 초여름에 푸르던 수수가 누렇게 익었다. 가을임을 알려주듯이 열매를 가득 실어 숙여진 고개가 바람이 일렁인다.
수수밭 밑으로 고개 숙인 벼가 가득하다. 농부의 예술적인 솜씨가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들녘이 가득히 메운 벼가 파도를 타고 있다. 푸름과 누런 색이 잘 어울리는 널따란 캔버스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선 들판 끝, 노란 꽃이 가득하다. 무슨 꽃이 저렇게도 많을까? 너무 예쁜 꽃이 가득하다. 돼지감자가 노란 꽃을 피운 것이다. 그대로 갈 수가 없다. 자전거에서 내려 돼지감자 꽃을 바라본다. 작은 해바라기와 같은 모습, 무더기로 피어 있는 모습이다. 누가 돼지나 먹는 감자라 했을까?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구경해야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이다.
길가의 외딴집, 주변엔 늘 꽃들이 가득하다. 그중에도 하얀 설악초가 눈길을 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듯이 다복하게 모여 빛을 발한다. 마침 찾아온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설악초, 미국이 원산지로 산에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로 Snow on the mountain이니 잎에 흰 무늬가 있어서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는 꽃이다. 빙화(氷花), 설화(雪花), 설화초(雪花草)라는 이름도 있는 꽃이 눈길을 끌고 있다. 한참을 내려 바라보다 달려간 곳엔 하얀 도라지 꽃이 가득하다. 투명한 맑은 빛으로 환하게 비추는 꽃이다.
하얀 꽃과 보랏빛을 보여주는 도라지 꽃, 하얀색으로 치장을 하고 길손의 발을 잡는다. 작은 밭에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의 밥상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는 도라지, 양지 녘에 앉아 껍질을 벗기는 할머니가 생각나는 도라지밭이다. 작은 밭이지만 빈틈이 없을 정도로 도라지가 무성하게 자랐다. 역시, 농부는 그냥 농부가 아니라 예술가임이 틀림없다. 동네 어귀로 돌아오는 입구, 동네를 둘러싼 산 아래엔 언제나 정겨운 집이 한 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기가 모락모락 굴뚝으로 솟아오른다. 저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늘 궁금하지만 찾아가지는 못해 늘 아쉬워하는 집이다.
작은 시골 동네를 올라가는 길에 멀리서 늘 정다운 연기를 보여준다. 마지막 남은 힘을 더해 보는 자전거 길이다. 언덕배기 밭둑엔 노란 꽃이 보인다. 한 무더기가 꽃을 피우고 바람에 일렁인다. 삼잎국화가 꽃을 가득 피운 것이다. 호랑나비 한 쌍이 너울대고 있다. 자연의 어울림이 발길을 잡고 말았다. 사진을 찍을까 망설이다 나비의 즐거움을 방해할까 그만두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모습이다.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곳곳에서 만나는 즐거움에 오늘도 발길이 늦어지고 말았다. 늦었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오늘도 살아 볼만하다는 생각으로 힘을 내보는 아침나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