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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Dec 02. 2021

미루나무, 잊지 못할 추억을 주었다.

(미루나무의 추억, 미루나무)

아침 햇살이 내려온 아침, 덩달아 바람도 산을 넘어왔다. 긴 신작로, 양옆으로 미루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다. 노랗게 가을 색을 입고 서 있는 미루나무에 햇살이 온 것이다. 덩달아 따라온 바람이 잎을 간질이며 그냥 두지 않는다. 연약한 잎에 가을 색이 물든 미루나무 잎,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앞뒤를 번갈아 보여줌이 환상적인  율동이었다. 미루나무가 자리 잡은 곳은 가끔 버스가 오가고, 군용 트럭이 주를 이루는 일명 '신작로'였다. 포장은 생각지도 못하는 시절, 자갈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시골길이다. 거기엔 미루나무가 일열로 도열해 있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시절, 책을 싼 보따리를 작은 등짝에 대각선으로 붙들어 맸다. 보따리 안에는 몇 권의 책과 공책 그리고 연필통이 들어있다. 책 보따리 안에  있는 양은 도시락과 함께 예기치 못하는 악기들이다. 양철로 만든 필통엔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가끔은 컴퍼스도 들어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운 도시락 속엔, 반찬을 넣는 작은 통과 젓가락이 들어 있다. 책보따리를 등에 매고 뛰는 속도에 따라 적당한 음에 박자를 맞추어 소리가 난다. 필통과 도시락은 뗄 수 없는 협력자였다. 적당한 크기의 소리는 뛰는 속도에 따라 조절되곤 했다. 긴 신작로 길을 따라 뛰는 시골길엔 미루나무가 손을 흔들며 도열해 있었다. 

도시에도 가을이 왔다.

시골 동네 앞뜰 구레 논, 구비구비 기다란 다락논에 물이 고여있다. 찰랑찰랑한 물속에도 미루나무가 누워 있다. 혹시 둑이 무너질까 심어 놓은 미루나무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기다란 둑을 따라 드문드문 미루나무가 심어져 있다. 가지를 잘라 논둑에 꾹 찔러 넣는 것이 미루나무 심기였다. 어느새 잎이 나오고 몸집을 불려 나무의 형태를 갖춘다. 서서히 연초록 잎이 나오고 미루나무는 키를 키웠다. 적당히 햇살이 오고 바람이 찾아왔다. 살랑이는 바람 따라 미루 나뭇잎이 앞뒤를 번갈아 보여준다. 살랑이는 속도는 바람 세기에 따라 달라진다. 미루나무가 논으로 내려온 것이다.


미루나무는 미국 중부, 동부, 남부에 분포하는데, 개화시기에 수입해 심기 시작한 나무다. 아름다운 버드나무란 뜻의 '미류(美柳) 나무’라 부르던 것이 맞춤법 표기에 따라 미루나무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한때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나무이기도 하다. 일명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불리었던 사건 때문이다. 1976.8.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을 때, 북한군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다. 미루나무가 집중 조명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일 것이다. 지금은 도로에서는 사라지고 볼 수 없지만 기억 속에는 깊이 남아 있는 나무다

바람에 살랑이는 미루나무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철이 왔다. 모를 심기 위해선 골짜기부터 내려온 한 모금의 물이라도 모아야 했다. 도랑을 따라 내려온 물이 논에 가득 고였다. 잔잔한 논 속으로 미루나무가 풍덩 뛰어들었다. 살랑이는 잎은 물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답다. 노랑과 푸름이 적당히 담긴 물이 출렁인다. 잔잔한 물속에 몸을 드리운 미루나무는 푸른 하늘에서도 몸을 흔든다. 덩달아 물속의 미루나무도 흔들린다. 미루나무가 서서히 잎에 물들이는 가을, 서서히 시골 농부들 발길이 잦아졌다. 여름내 정성 들인 벼가 누렇게 익었기 때문이다. 가끔 찾아오는 참새가 포식을 하지만, 농부가 그냥 둘리가 없다. 허수아비가 등장하고, 새를 쫓는 아이가 등장한다. 


미루나무가 있는 논둑을 따라 심어진 콩도 가을을 맞았다. 누런 잎이 가득해질 즈음, 농부의 발길은 한 없이 바빠진다. 콩을 베어 말려야 하고, 고개 숙인 벼를 베어야 한다.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올 무렵, 온 동네가 아침부터 시끄러워진다. 품앗이 동네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윗집 일이 내일이고, 내일이 이웃집 일이었다. 새벽부터 온 동네 일꾼들이 모였다. 새참 때가 되어 등장한 새참상, 미루나무 밑에 차려진 새참상은 부러울 것이 없다. 노란 콩나물 무침이 있고, 기름이 좔좔 흐르는 김이 있다. 하얀 쌀밥에 고깃덩이가 숨어 있는 얼큰한 찌개가 있고 시원한 막걸리가 있다. 미루나무가 주는 그늘 속 잔치상이다. 서서히 가을이 깊어진다.

은행잎이 가득하다.

미루나무에도 가을이 깊어 서서히 겨울을 준비한다. 미루나무도 하나둘씩 잎을 떨구어 내야 했다.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같이한 잎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이다. 다가오는 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둘씩 떨구었다. 노란 모습으로 함께했던 가을이 그리운 계절이다. 노란 잎은 신작로에도 그리고 다락논에도 가득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미루나무는 잎은 보이지 않고 가지만 남아있다. 찾아온 찬바람에 한가로이 일렁인다. 가끔 찾아오는 새들만이 반겨준다. 봄이 왔고 여름이 왔다. 풍성함에 아름다움을 주었던 계절 속에 한 해를 되뇌어 본다. 감사한 마음으로 겨울을 준비해 봄을 맞이해야 한다. 


신작로에도 구레 논에도 노란 미루나무 잎이 떨어졌다. 껑충한 키에 썰렁한 가지만 남아 있다. 지나온 계절 속에 푸름과 추억을 가득 누렸다.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삶의 궤적이었다. 서서히 초겨울로 접어 들 무렵, 심통난 겨울바람이 찾아왔다. 노란 잎으로 치장했던 미루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리를 내 지른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찬바람에 소리 내어 겨울을 알려준다. 눈보라와 함께 한 칼바람을 이겨내기 힘겨웠나 보다. 책보따리를 동여맨 시골아이도 발걸음이 바빠진다. 파고드는 찬바람에 서둘러 집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꼬약꼬약 피어나는 굴뚝 연기를 보며 안도의 숨을 쉰다. 따스한 아랫목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다. 찬바람에 미루나무가 옹알거리는 시골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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