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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an 07. 2022

겨울 냉이의 달큼함을 아십니까?

(냉이를 캐다, 겨울 냉이)

봄나물 하면 달래, 냉이, 씀바귀를 생각하게 된다. 나물 뜯는 아가씨 그리고 바구니와 호미의 연상은 당연히 초봄이다. 흰 저고리에 질끈 묶은 긴 머리, 흰 버선에 검은 고무신을 신은 산골소녀가 길가에 앉아있다. 옆에는 작은 바구니가 놓여있으니 당연히 봄나물을 뜯는 시골소녀다. 소녀가 나물을 뜯는 시골 언덕, 멀리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야트막 한 산자락엔 붉은 진달래가 피어 있고, 소를 부리는 농부의 거친 숨소리도 들리는 시골이다. 아늑한 산으로 둘러싸인 인적 드문 시골 동네, 봄이면 연상되는 풍경이다. 가을이 내준 골짜기에 겨울이 자리를 폈다. 산을 넘은 추운 바람이 호령을 한다. 덩달아 시골에서는 할 일이 많아진다.


조용한 시골집에 낙엽이 적잖이 떨어진다. 가끔 낙엽을 쓸기도 하고, 눈을 쓸기도 하는 것은 가을부터 겨울까지의 소일거리다. 쓸고 쓸어도 끝은 보이지 않는 일이다. 시골살이에 이것도 하지 않으면 뭘 하랴라는 생각에 재미로 하고 있는 일이다. 며칠 전, 뜰앞의 낙엽을 쓸고 있는 중이었다. 봄이면 동네 구경을 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찬 바람이 불면서 찾아오는 길손님도 뜸하다. 길 따라오다 보니 동네를 찾고, 아름다운 꽃을 따라 동네를 찾는다. 시골 주택이 보고 싶어 오기도, 살고 싶어 오기도 하는 곳이다. 찬바람이 불면서 한산한 시골, 멀리서 두런두런 이웃들의 소리가 들린다. 이웃들이 운동을 하러 나선 모양이다. 

부지런한 이웃집 아주머니, 비닐봉지에 무엇인가 가득 담아 들고 오신다. 복장은 운동복 차림에 손엔 호미가 들려있다. 운동을 하러 갔다 뭘 캐가지고 오는 모습이다. 뭘 하고 오시느냐는 말에 냉이를 캐온단다. 비닐봉지를 열고 냉이를 한 움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괜히 아는 척을 했는가 보다. 아무 표정도 없이 일상 하는 이웃의 인심이다. 오이를 따오다가도 몇 개, 고추를 따오다가도 한 움큼 건네주곤 한다. 늘 고마워 일부러 외면하기도 하는 시골살이다. 냉이, 냉이는 봄에나 캐는 것이지 않느냐는 말에 그렇지 않단다. 겨울 냉이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느냐면서 냉이를 건네주는 것이다. 시골살이엔 이런 재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닌가?


아내에게 냉이 봉지를 건네니 깜짝 놀란다. 어쩐 냉이가 겨울에도 있느냐는 것이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많이 캐 오면서 한 움큼 주었다는 말에 흐뭇해한다. 시골에 자리를 잡으면서 아내는 잔재미를 많이 찾았다. 산나물을 뜯고, 채소를 기르며 이웃들과 어울리는 재미다. 가끔은 메뚜기를 찾아 들판을 헤매기도 한다. 겨울 냉이가 있음을 알았으니 언젠가 냉이를 캐러 간다는 다짐을 했으리라. 이런, 저런 일로 바빠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 한가한 오후, 아내가 말을 건다. 냉이 캐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려니 하던 생각, 심심하던 차에 등산화를 신고 산길을 올랐다. 뒷산을 올라가면 야트막한 곳에 여러 개의 비탈밭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냉이를 캤던 밭을 연상하며 산을 올랐다. 운동도 할 겸 오르는 산길은 갖가지 방해하는 것이 많다. 수북이 떨어진 낙엽에 길이 미끄럽다. 조심하지 않으면 산아래까지 미끄럼을 탄다. 조심하며 오르는 산길, 곳곳에 부러진 나무들이 가득하다. 산골짜기의 단골손님인 바람이 만든 짓이다. 곳곳에 삭정이가 길을 막고 있어 조심스레 산을 올랐다. 평평한 골짜기에서 만난 비탈밭, 허연 곡식 대가 남아 있다. 냉이가 자랄 틈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곡식일까? 당뇨에 좋다는 율무를 거두고 남은 것이다. 커다란 밭에 율무를 수확하고 남은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냉이가 자랄 틈이 없는 것이다. 


지난봄엔 많은 냉이를 캤던 곳이다. 할 수 없이 다른 밭을 찾아보기로 하고 발길을 옮겼다. 다시 만난 빈 밭, 푸르른 풀이 남아 있다. 널찍한 비탈밭 한쪽으론 비닐을 덮고 고추를 재배한 곳이다. 고추를 수확하고 고춧대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한쪽으로는 빈터가 남아 있다. 곳곳에 푸르름이 있는 곳에 눈이 번쩍 뜨이는 냉이가 자라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이지만 냉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내와 함께 냉이를 캐기 시작했다. 봄에 캐는 냉이가 아니라 초겨울에 냉이를 캐는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냉이를 캐러 이름 모를 골짜기에 있는 것이다. 삶은 작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늘 하게 한다. 내가 이런 골짜기에 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 삶은 재미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냉이는 비타민 A, B1, C가 풍부해 간과 눈에 좋다고 하는 식품이다. 동의보감에도 간과 눈에 좋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칼슘, 칼륨과 인, 철 등의 무기질도 다양하고, 뿌리에 있는 콜린 성분이 간경화와 간염 등 간 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냉이는 국을 끓여 먹기도 하지만 무침이나 튀김용으로도 이용되는 식품이다. 냉이를 데처 넣은 냉이 김밥, 냉이 파스타 등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식재료이다. 다양한 영양소가 담긴 식품이지만 오염에 노출된 길가나 오염된 공간에서 채취하지 않아야 한다. 서늘한 골바람이 등짝을 움츠리게 하지만 냉이를 캐기에 바쁘기만 한다. 골짜기의 추위 속에서 많은 냉이를 캤다. 냉이는 늦겨울이나 이른 봄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겨울 냉이는 뿌리에서 특유의 향이 더 강하다.

겨울에 캐는 냉이는 뿌리가 기다랗게 땅 속까지 박혀있다. 봄철에 만난 냉이는 잎이 풍성한 반면, 겨울 냉이는 뿌리가 풍성하다. 따스한 봄날엔 햇살을 많이 받아 잎이 풍성하다. 겨울철에 살아남기 위해선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굵직한 뿌리가 땅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굵고도 하얀 뿌리가 땅속 깊이 박혀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땅을 깊이 파고 캐낸 냉이, 향긋한 향이 진하게 퍼져 온다. 역시 봄에 캐낸 냉이 하고는 전혀 다른 맛이다. 겨울 냉이의 맛에 들과 밭에 사람들이 서성임을 알게 하는 향기였다. 한참의 서성임 속에 많은 냉이를 캔 아내는 흐뭇해한다. 하지만 냉이를 씻어내는 작업도 보통 일은 아니다. 


잎과 뿌리 곳곳에 있는 흙을 씻어내기 위한 작업은 고단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씻어낸 냉이, 하얀 뿌리가 튼실하다. 길쭉한 하얀 뿌리가 길게 뻗어 예쁘기도 하다. 뿌리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가 숨을 멎게 한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기막힌 향이다. 어머니의 냉이 음식에는 국이 있었고 무침이 있었다. 콩가루와 함께한 냉잇국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맛이었고, 된장에 무처낸 냉이는 봄을 가득 실어다 주곤 했다. 겨울 냉이의 맛은 봄 냉이와는 다른 맛이었다. 살짝 데쳐 무쳐낸 냉이 맛은 달큼하면서도 향긋함이 숨어 있었다. 달착지근한 뿌리의 맛은 환장할 골짜기의 맛을 담고 있다. 어느 고단함도 넘어설 수 있는 짜릿한 맛이고, 어느 나물과도 비교대상의 맛이 아니었다. 봄냉이가 향긋함을 준다면, 겨울 냉이는 달큼함과 향긋함을 함께 주는 시골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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