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Dec 31. 2021

또, 한 해가 이렇게 가고 있었다.

(이해의 끝머리, 앞 도랑이 얼었다.)

하루 단위가 아닌, 주일 단위로 뛰어넘던 세월이 마구 흘러갔다. 언제 흘렀는지 달력 열한 장을 넘기고, 홀로 남은 한 장 마저 넘겨야 한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떡 버티고 있는 날이다. 외로이 붙어 있던 달력 한 장이 넘아가면 새 달력이 배시시 웃을 내일이다. 덧없이 빠른 세월 탓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한 해다. 삶에 일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별난 계획 없었기에 탈 없이 지난 한 해가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연말이다. 새해 들어,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누런 잔디를 제치고 솟아나는 새싹에 몸 둘 바를 몰랐었다. 작은 바람에 바르르 떠는 잎새가 신기하고도 앙증맞아서였다. 서서히 이슬을 먹고 자란 잎이 널찍해질 무렵, 봄은 질펀하게 잔디밭에 앉고 말았다. 서둘러 잎새가 널찍해질 무렵, 작은 화단은 식구들로 가득해져 신이 났었다. 처마 밑에 산새가 둥지를 틀고, 꽃잔디가 기지개를 켤 무렵 갖가지 푸름이 골짜기를 메워나갔다. 꽃잔디 위로 영산홍과 철쭉, 노란 산수유가 꽃을 피웠다. 뒤뜰에 산벚꽃이 가득히 피자 황 겹매화가 꽃을 피우고, 하얀 찔레꽃이 덩달아 찾아왔다.

골짜기에 봄이 왔다.

서서히 봄이 익어가고 아지랑이가 무르익었다. 달래, 냉이, 씀바귀가 촉을 내밀고 도랑가 미나리가 꿈틀거렸다. 파릇한 쑥이 고개를 내밀 무렵, 채마밭 식구들이 들어앉았다. 상추와 쑥갓이 자리했고, 곰취와 케일이 자리 잡을 즈음엔 덩달아 앞산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돌나물이 싹을 내밀자 홑잎 나물이 삐죽이 나왔고, 덩달아 고사리와 취나물이 동참했었다. 칠자화 잎이 가득해지고, 두릅이 손을 내밀어 골짜기는 부자가 되었다. 어느새 냉이 꽃이 자리를 잡고, 씀바귀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노란 황계국이 잔디밭 가를 점령했다. 황금 꽃을 가득 얹고 봄을 노래하니 허전하던 여름 식구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에 마당 식구들이 가득해졌다. 갖가지 꽃으로 가득한 마당엔 들어설 자리조차 없이 자릴 잡았다. 수국이 고개를 숙였고, 개키버들이 어깨를 늘어뜨린 즈음에 보리수나무와 홍화 산사나무도 꽃을 내밀었다. 어느새 아카시 꽃이 잔치를 할 무렵,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산을 메웠다. 서서히 장마가 찾아왔다. 앞 도랑은 몹 집을 불려 골짜기를 호령했고, 분홍 꽃범의 꼬리가 마당을 가득 메웠다. 어느새 밤나무가 꽃을 피워 향을 내 쏟더니 동네 벌들이 다 모여들었다. 서서히 여름이 익어갔다. 작은 채마밭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여름이 깊숙이 찾아왔다

작은 상추가 널따란 잎으로 변했고, 쑥갓이 특유의 향을 쏟아냈다. 곰취와 케일이 든든함을 과시할 즈음, 빼놓을 수 없는 방울토마토가 방울을 달았다. 몇 개 핀 노란 감나무 꽃이 풍성해지고 짙어졌다. 푸름에 붉음이 가미된 토마토가 춤을 출 즈음, 보랏빛 가지가 빛을 발하고 덩달아 고추가 열매를 달기 시작했다. 서서히 여름이 가득해지자 작은 채마밭은 들어서 틈이 없어졌다. 토란 줄기가 굵직해졌고 실부추가 살이 올랐다. 붉은빛 방울토마토도 살을 가득 찌웠고, 초록빛 고추는 붉음으로 변해있었다. 서서히 앞산에 밤나무가 묵직해질 무렵에 가을바람은 서서히 산을 넘었다. 산을 넘은 바람이 넓은 앞 뜰을 찾아왔다. 


여름을 서둘렀던 농부들 발걸음은 가득한 들판을 만들었다. 앞 논이 검푸름으로 가득하고, 서서히 비탈밭은 푸름으로 가득해졌다. 자갈밭이 검푸름이 될 즈음, 앞산의 검푸름이 흘러내렸다. 서서히 비탈밭에 국화가 꽃망울을 달았고, 기어이 밤송이가 입을 열었다. 동네 꼬마들 발걸음 바빠질 무렵, 들녘은 황금 물감이 흘러내렸다. 밤이 영글고, 곡식이 영글어 가을이 점점 깊어갔다. 국화는 어느새 빛을 발하고, 꺽다리 코스모스 불게 물들자 어느새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메웠다. 구절초가 하얀 꽃을 달자 서서히 가을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가을은 한층 여물었다.

찬바람이 서서히 찾아 올 무렵, 하늘은 더없이 높아갔다. 농부들 발걸음 바빠지고, 가을은 덩달아 깊어만 갔다. 비탈밭이 휑해지고 넓은 들판이 비워질 무렵, 가을은 서둘러 뒷산을 넘었다. 가을 자리 차지한 겨울바람이 어느새 옷깃을 여미게 할 때, 여윈 도랑물이 졸졸거렸다. 서서히 초겨울이 자리한 골짜기였다. 찬바람이 찾아오고 굴뚝에선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움츠리고 물러갈 즈음, 겨울이 떡하니 자릴 잡았다. 눈이 오고 찬바람이 찾아와 골짜기는 어느새 입을 닫았다. 눈이 오는 겨울이 깊어 갈 무렵, 달력은 다 떨어져 기어이 한 장만 남게 되었다. 마지막 하루 남긴 달력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있는 오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체감온도 영하 20도, 전원주택 골짜기가 얼어붙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