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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an 13. 2022

삶은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고비사막의 아침)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 가난과의 싸움은 어쩔 수 없는 삶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고 이를 벗어나려는 부모님의 발버둥은 늘 안쓰럽기만 했다. 큰 아들이지만 큰 아들이지 않았던 아버지, 늘 거기엔 작은 할머니가 버티고 있었다. 할머니와 사별 후 재혼하신 할아버지, 늘 할머니 그늘에서 허덕이고 계셨다. 하나의 힘도, 재력도 없었던 할아버진 늘 할머니의 눈 아래 삶을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장죽을 입에 문 할머니, 높은 사랑채 마루에 앉아 계셨다. 아래를 호령하듯 바라보고 있었던 당신, 윗집과 아랫집의 호랑이와 다름없었다.


윗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 그리고 서울 나들이를 자주 하셨던 아버지와 배다른 삼촌이 살고 계셨다. 아랫집은 큰 아들 아닌 큰아들인 아버지의 집이었다. 늘, 윗집의 그늘 아래 있어야만 했던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서였다. 작은 할머니 그늘에 묻혀 사시는 할아버지,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리라. 언제나 윗집이 우선이었고 아랫집은 모든 것이 다음 순위였다. 작은 할머니의 고집이었고, 할아버지의 전함이었으니 아버지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거기엔 수긍만 할 수 없는 나의 어머니가 계셨다. 아버지 의견을 늘 거역하진 않았으나 가끔은, 반기를 들고 말았다. 

명사산 월하천

어째서 윗집만 섬기며 살아야 하느냐는 반역(?)이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도전장은 바로 작은 할머니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었다. 아랫집과 윗집의 다툼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들의 다툼 속에 언제나 기가 죽어야 하는 자식들, 어떻게 돌아가는 가족사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언제나 먹거리가 풍족했던 윗집,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아래 집이었다. 윗집엔 감나무와 밤나무 그리고 복숭아, 자두나무 등 많은 먹거리가 풍부했다. 거기엔 장죽을 물고 계신 할머니가 감시의 눈이 있었다.


보리가 익어가고, 밀이 익어가는 한여름이다. 허리까지 자란 밀밭의 한가운데에 복숭아나무가 있다. 한그루가 아닌 많은 복숭아나무엔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복숭아가 열렸다. 익음이 넘친 복숭아는 밀밭을 붉게 물을 들였다. 붉게 물든 복숭아를 먹을 사람이 없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눈이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있는 밀밭 근처에는 얼씬할 수 없는 어린것들이었다. 아래 집 뒤 울에는 커다란 감나무와 밤나무가 있었지만 주인은 따로 있었다. 주인은 다름 아닌 작은 할머니였는데, 왜 그런지는 몰랐다. 우리 집 뒤뜰에 있는 감나무가 왜 우리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작은 할머니의 위엄(?) 아닌 억지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풍경

작은 할머니의 분부가 떨어지기 전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엄하신 아버지, 언제나 말이 없으셨다. 어린것은 감히 왜 그런지 여쭤볼 수가 없었다. 작은 할머니가 건네는 몇 개의 감과 밤만을 먹을 수 있는 손자 아닌 손자로 살아야 했다. 감을 따고 남은 것만을 먹어야 했고, 밤을 털고 남은 것만을 주워야 했다. 작은 할머니의 욕심을 채우고 남은 것이어야 손을 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아랫집, 먹고도 남는 것이 윗집의 풍경이었다. 언제나 윗집과는 거리가 먼 아랫집의 살림살이, 하지만 부모님의 정은 그렇지 않았다. 왜 그런지 가끔 엄마에게 불편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서울 나들이가 잦았던 삼촌이 시골에 내려오신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한 끼의 밥이라도 해 드려야 했다. 엄마 음식이 맛있다는 삼촌의 말,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늘 그랬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삼촌을 모시러 가야 했다. 어린 철부지는 늘 불만이었다. 왜 그 밥을 해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절하도록 잔인한 작은 할머니의 아들, 왜 그리 지극정성이어야 했을까? 언제나 불만이었고 불편했다. 부모님의 정이었음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학비 때문에 쩔쩔매는 우리 집과는 다른 윗집이었다. 언제나 풍성한 살림살이로 비참함을 안겨주는 윗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모습, 상상을 할 수 없는 살림이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만난 풍경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고, 구경도 하기 힘든 배드민턴이 있었다. 마당 구석엔 세발자전거가 놓여 있었고, 생면부지의 기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쇠줄로 연결된 기타, 줄을 건드리니 소리가 났다. 상상을 할 수 없는 악기였다. 당장 먹고살기가 힘든 큰아들 아닌 큰아들, 신 문물의 홍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삼촌이었다. 거기엔 한마디의 불만도 있을 수 없었고, 당연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세월은 쉬이 흘러갔지만, 가슴에 있는 한은 여전했다. 살림살이를 아껴야 했고, 부자 아닌 부자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런 삶을 차려보고 싶은 어린것이었다.


세월이 흘러갔고, 각자의 손자들은 삶을 꾸려갔다. 고단하고도 힘든 세월이었지만 늘 가난을 면하고 싶었다. 돈을 아껴야 했고, 절약하고 검소한 삶으로 살아야 했다. 한 개의 전등불을 아끼려 했고, 한 모금의 수돗물이 헛되지 않아야 했다. 아끼고 모으는 것이 삶이 된 몇십 년이 넉넉지는 못해도 궁하지 않은 살림이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살아온 삶의 방식은 변함이 없다. 하나라도 아끼고 절약하는 삶은 가끔 아이들에겐 불편한가 보다. 전기를 아끼고, 물을 아끼려는 부모가 야속한가 보다. 가난에 멍든 삶, 아껴야 살 수 있었던 아비의 삶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다. 

모로코 여행 중 만난 풍경(셰프 샤우엔)

처절한 가난이 만들어 낸 나의 삶, 삶 속엔 우연이 아닌 필연이 삶이 숨어 있었다. 평생 할 수 없었던 음악을 해보고 싶었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가슴에 남아 있던 오래 전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어서였다. 돈을 모아보고 싶었고, 내가 하고 싶은 삶을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삶이 넉넉해서가 아닌,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만든 삶이다. 오늘도 아침 운동을 하러 나선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운동은 계획과 어그러짐이 없다. 쉬이 넘볼 수 없는 글을 써보려 한다. 글 같지 않은 글일지라도 지금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글, 지금 그려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리려 한다. 가슴속에 깊이 숨어 있던 응어리를 실컷 풀어내고 싶은 생각에 오늘도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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