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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an 23. 2022

전원에 하얀 눈과 햇살이 왔다.

(눈이 내린 골짜기, 뜰에 눈이 내린 모습)

지난밤에 하얀 눈이 골짜기에 가득 내렸다. 창문을 열자 겨울이 이제야 온 듯하다. 앞산이 하얗게 물이 들어 있다. 겨울을 만끽이라도 하듯이 게으른 닭 한 마리가 길게 목청을 돋운다. 여기에 질세라 이웃집 지킴이도 짖어댄다. 내리는 눈을 즐기듯이 짖어대는 동네 지킴이다. 여기에 느닷없이 햇살이 산을 넘었다. 힘찬 화살 되어 뒷산으로 넘어갔다. 뒷산 곳곳이 환해질 무렵, 산 식구들도 하나씩 깨어난다. 멀리 꿩 한 마리가 신이 난 듯 날아오르고, 이에 놀란 산새들이 덩달아 하늘로 따라간다.


먼산에도 하얀 눈이 가득 내렸다. 푸름을 배경으로 하양이 빛나는 먼산, 햇살까지 더해저 골짜기를 빛내준다. 얼른 사진을 찍어 부산에 사는 딸에게 보냈다. 깜짝 놀라며 눈이 그립단다. 눈을 볼 수 없는 손녀가 볼 수 있도록 구정까지 잘 지켜달란다. 눈을 만날 수 없는 손녀를 위해 눈을 지켜야 하는데 걱정이다. 눈을 보기 위해 덕유산을 갔었다는 소리에 삶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삶 속엔 언제나 눈이 있었다. 겨울이면 자주 만나기에 귀한지도, 소중한지도 모르며 살아왔다. 언제나 겨울이면 오는 눈이려니 하면서 살아왔다. 곳곳에 내린 눈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오가기가 불편하기도 했었다. 눈사람을 만들고 산토끼를 쫓아 산을 누볐던 어린 시절이었다.

앞 뜰에도 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가 생각나고, 비료포대가 그리운 시절이었다. 가끔은 눈사람을 만들어 눈 세상을 즐기던 오래 전의 추억이다. 세월이 흘러 남자임을 깨닫게 되는 군에 입대했다. 겹겹이 내린 눈을 동계훈련을 하기 위해 온몸으로 맞이했다. 꽁꽁 언 산등성이에 참호를 파고 며칠을 버티어 냈다. 군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던 시절이다. 전쟁만은 일어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부대로 돌아온 겨울날,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높은 사람(?)이 오가는 곳엔 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가보다. 눈이 내리기가 무섭게 쓸어내야만 했던 시절, 가끔은 생각했었다. 그들은 눈을 왜 싫어할까? 야속하기만 했던 눈에 대한 기억이다.


뜨락에 눈을 쓸고 집 앞 도로에 눈을 쓸어야 했다. 조금 늦으면 이웃이 쓸어내기에 얼른 서둘러야 한다. 한쪽은 이미 이웃집에서 눈을 쓸어 버렸다. 또 한쪽은 아랫집에서 쓸어오고 있다. 얼른 서둘러야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다. 갑자기 군대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다. 아마 눈이 온 골짜기에 훈련을 나온 모양이다. 모두가 아들 또래의 군인들, 아들이 생각나고 군대 시절이 생각 난 이유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수고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온다.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사와 되돌아온 말이었다. 얼른 눈을 쓸어내야 오가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다. 서둘러 눈을 쓸어 낸다.

잔디밭에 하얀 눈과 햇살이 만났다.

눈을 쓸어 도랑으로 밀어내려는 순간, 일 년간 끊임없이 흐르는 도랑은 오늘도 멈춤이 없다. 내리는 눈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유유히 흘러감이 끝이 없다. 겨울 도랑은 겹겹이 쌓인 눈을 이웃 삼아 세상을 보는 눈만 빠꼼하다. 빠꼼한 눈 속엔 파란 하늘을 가득 안았다. 세상 그림이 가득히 들어 있는 도랑이다. 눈이 내리고, 하얀 눈을 가득 인 소나무도 들어있다. 한없이 받아들이는 세상 이야기와 상관없이 도랑은 여전히 골짜기를 노래한다. 갈갈대는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눈을 쓸어낸다. 이웃도 열심히 눈을 쓸어 동네가 말끔해졌다. 길은 훤하게 되었지만 곳곳에 하얀 눈이 아름다운 골짜기다. 언제 이런 눈을 또 볼 수 있을까?


갑자기 조용하던 골짜기가 어수선하다. 눈이 가득 실은 나무에 앉았던 새가 날아간다. 느닷없이 깜짝 놀란 나무가 눈을 털어낸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광경이다. 눈을 털어낸 나무가 한숨을 쉰다. 서서히 녹아내리던 눈이 한 번에 떠났음에 반가움과 아쉬움의 표현이다. 얼른 고개를 든 나무가 한 숨을 푹 쉰다. 덩달아 도랑으로 떨어진 눈은 오간데 없다. 넉넉한 도랑물이 얼른 품어 준 것이다. 이웃들과 함께한 아침이 상쾌하다. 눈을 맞이하고, 눈을 쓸고 난 골짜기의 아침이다. 마침 햇살이 마당에 가득 내려왔다. 잔디밭을 덮은 눈 위에 내려온 것이다. 한없이 맑은 골짜기에 하양이 어우러진 진풍경이다. 

수석에도 눈과 햇살이 내렸다.

일 년간 푸르름을 주던 잔디밭, 겨울 들어 누런 모습이었다. 그간의 푸름을 잃어버린 빛깔에 가끔은 안쓰럽기도 했다. 봄을 기다리는 누름이지만 기세 등등했던 시절이 그리워서다. 언제나 젊음이 남아 있지 않듯이 자연도 마찬가지다. 푸름이 누름이 되고, 다시 누름은 지고 봄을 기다린다. 안타까운 마음을 알았는지 지난밤에 하얀 눈이 덮어 주었다. 고맙고도 아름다움에 한참을 바라본다. 하얗게 물든 잔디밭에 맑은 햇살이 빛을 발한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위해 서재에 앉았다. 은은히 풍겨오는 커피 한잔의 여유, 골짜기에서 만나는 고마움이다. 눈을 가득 안은 정원은 말이 없다. 기세 등등하던 소나무도,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도 묵묵부답이다.


찬란한 햇살이 서서히 말을 시킨다. 소나무에 내린 눈이 녹아 끄떡이고, 지붕 위에 쌓인 눈이 한마디 건넨다. 서서히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된 것이다. 처마를 타고 내린 물방울이 무뚝뚝한 말을 건넨다. 조용한 골짜기가 고요함을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햇살이 더 내려와 온 앞산을 덮었다. 맑은 하늘이 찾아와 골짜기가 훤해진 것이다. 게으른 이웃집 닭도 긴 울음을 울어댄다. 동네 지킴이도 맥칼 없이 짖어댄다. 겨울에서 깨어나려는 골짜기에 하얀 눈이 이야깃거리를 준다. 이왕 내린 눈이니 한참을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찾아 올 손녀가 한 번이라도 눈사람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손녀가 찾아올 때쯤 듬뿍 내려주면 얼마나 더 고마울까? 하얗게 내린 눈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작은 골짜기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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