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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Feb 01. 2022

꽁꽁 동여맨 수도꼭지, 설날 아침에도 말이 없다.

(설날의 추억, 추억 속의 기억들)

섣달그믐 즈음이 되었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섣달이 지나고 새해가 오는 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핍한 살림이지만 설날을 그냥 지날 수 없다. 대목 장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차례상에 올릴 제수용품을 준비해야 한다. 자식들 옷이라도 해줘야 하고, 하다 못해 양말 한 짝이라도 사줘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골에서 돈 거리가 될 것이 많지 않다. 보리쌀로 아껴온 쌀자루와 여름내 키워 온 닭이라도 팔아야 했다. 아끼고 아낀 고추근이라도 내야 했다. 가용 돈을 마련할 재간이 없는 살림살이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을 기대해 보지만 그놈도 살아가기 쉽지 않음을 벌써 알았다. 버겁게 머리에 얹고 나가는 곡식, 일 년 내 피와 땀이 영글게 했던 선물들이다. 


동네를 벗어나면 기다리고 있는 장사꾼들, 한참 실랑이를 해야 한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하는 사람과 장사꾼과의 씨름이다. 언제나 선심을 쓰는 듯한 장사꾼에 늘 판정패하는 한판이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설날 음식과 자식들 옷거리도 준비할 수 있다. 처절한 삶의 현장이기도, 살아가는 재미이기도 하다. 서서히 시골 동네 설 모습이 오고 있는 모습이다. 긴 행렬로 대목장을 향하는 발길, 옆 동네 사는 인척도 만났다. 서로가 반가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장마당, 버겁지만 막걸리 한잔으로 정을 나누기도 하는 장날이다. 시끌벅적한 시골 동네 설날은 대목 장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수백 년을 감수한 향나무

섣달그믐이 다가 오자 귀한 흰떡도 준비했다. 방앗간 주인도 그간의 감사함에 가래떡을 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어머니는 벼르고 별러 간신이 퍼낸 쌀을 불려 방앗간으로 향한다. 가래떡을 해야 하는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방아 소리가 시끄럽다. 온 동네잔치가 벌어지는 방앗간이다. 어떻게 하면 모락모락 김이나는 떡 한입 얻어먹을까 하는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줄줄 밀려 나온다.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떡가래, 찬물로 직행하는 하얀 떡가래에 눈이 모였다. 뚝 잘라 입에 넣어 주는 맛, 두고두고 잊지 못할 맛이다. 운이 좋아야 한 볼태기 얻어먹을 수 있는 방앗간의 풍경이었다. 


저녁나절이 되어 대목장이 파하면 모두 집으로 향한다. 머리 위엔 소중한 장거리가 들어있다. 사과와 배가 들어있고, 귀한 조기도 한 마리 들어있다. 어린 자식에게 입힐 옷가지도 들어 있다. 아이들 생각에 어른들은 양말 하나로 대신했다. 대처로 나간 사람들도 긴 행렬에 합류했다. 꿈을 안고 떠났던 고향, 바리바리 선물이 들려있다. 힘겹게 살아온 서울살이, 생각만 해도 고단한 살림살이였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고, 눈물 나는 밥으로 끼니를 메워야 했다. 부모님을 생각해야 했고, 어린 동생의 꿈을 키워줘야 했다. 집안의 믿을만한 기둥을 길러야 하는 삶, 가정이 일어설 수만 있으면 했다. 장터에서 나눈 한 잔의 막걸리에 기분이 좋다. 

그해엔 눈이 많이 내렸다.

거나하게 한 잔 걸친 이웃집 아저씨, 오늘도 고단한 삶이 서린 노래가 빠질 수 없다. 삶의 고단함이 녹아있는 거나한 목소리엔 박자도 높낮이도 없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져야 했던 일 년 농사, 죽을힘을 다해도 끝이 없었다. 근근이 이어가는 삶의 고단함은 한 잔의 막걸리로 이겨내야 했다. 조상을 모셔야 하는 새해 언저리, 살아온 삶이 서글퍼서 질러보는 노래 한 자락이다.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그믐날이다. 대처로 나간 자식이 돌아왔고, 대목장 설빔이 펼쳐졌다. 일 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머리요, 모든 것을 나누는 한 해의 끝머리다. 분주히 떡을 썰고 새해맞이 준비를 한다. 어머니는 여름내 길러온 귀한 씨암탉도 잡아야 한다. 조상님께 무병장수와 풍년 농사를 빌고, 자식들도 한 볼태기 먹여야 했다. 긴 밤이 지나고 설날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 햇살이 밝아 오자 동네는 떠들썩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초가집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난다. 새해를 여는 첫 아침이다. 조상님께 하얀 쌀밥이라도 드려야 하는 아침, 부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차례상을 준비하며 새 옷으로 단장했다. 아이들은 설빔으로, 아버지는 장롱 속 두루마기로 대신한다. 온 동네가 떠들썩한 분위기, 두루마기의 행진이 계속된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건너 마을로 두루마기의 행진은 끝없이 계속된다. 거나하게 한 잔 걸친 어르신도 신이 났다. 한 잔 술에 신이 났고, 새해가 왔음에 설레는 아침이다. 아이들도 신이 났다. 새 옷에 신이 났고, 먹거리에 흥이 났다. 

작은 골짜기에 눈이 가득 내렸다.

하얀 떡국이 있고, 흰쌀밥이 있다. 기름이 발라진 김이 등장했고, 고기가 올려졌다. 쉽게 맛볼 수 없는 새해에 만난 밥상이다. 고단한 삶 속에 만난 새해 첫날, 어른들도 들떠 있다. 한 건배 돌려진 술잔 속에 진한 덕담이 오고 간다.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새해 첫날이다. 서둘러 차례를 지낸 이웃들이 오고 간다. 이웃집에 세배를 해야 하고, 음식을 나누어야 한다. 거나한 술자리는 하루 종일 이어진다. 하얀 두루마기 행렬은 아직도 여전하다. 이웃이 몰려오고, 재넘어 당숙도 찾아왔다. 한 해의 안녕을 묻고 주고받는 술잔이 이어진다. 언제나 술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오늘도 바쁘기만 하다. 종일토록 허리 펼 짬이 없는 어머니는 쉼이 없는 새해 첫날이다. 오랜 세월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흐르는 세월을 감당할 수 없는 삶이 지나갔다.


긴 두루마기 행렬은 차량행렬이 대신한다. 골목을 메운 차량 덕에 지나기가 불편하다. 대목 장날은 기억 속의 장날이 되었고, 먹거리와 입을 옷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웃을 오가던 꼬마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기억 속의 추억이 되었다. 고요한 정적만이 감도는 시골집엔 무너진 담장만이 우두커니 지키고 있다. 초가집은 허울 좋은 색깔로 변색되었고, 까치밥을 달고 있던 감나무도 세월을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꽁꽁 동여매진 수도꼭지는 설날 아침에도 여전히 말이 없다. 벽에 걸린 괭이와 호미자루가 썰렁한 시골집이다. 골목길을 뛰놀던 친구는 무엇을 하며, 아직도 살아있는지 궁금해진다. 두루마기 속 아버지도 자리를 떴고, 술상 차려내던 어머님도 자리에 없다. 당신의 동동주가 눈에 선한 그리움이다. 당신들 자리에 들어선 나이, 구수한 정을 주던 사람들이 더 그리워지는 정월의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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