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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Feb 17. 2022

신뢰를 잃은 사람들, 어디 쇼트트랙 심판뿐이겠는가?

(여의도의 상식과 원칙, 공정을 논하는 사람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선수들의 선전으로 온 국민들이 열광하고 있다. 언제나 전 국민이 환호하며 즐거워하는 올림픽이다. 동계 올림픽엔 효자 종목, 쇼트트랙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 선수들은 그렇게 잘 탈 수 있을까? 늘 생각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저히 추월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여지없이 상대를 추월한다. 어느 나라도 따르지 못하는 쇼트트랙, 하계올림픽에선 양궁 경기를 보면서 하던 생각이다. 어떻게 노력하면 저런 정도의 경기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단한 노력 속엔 진한 아쉬움이 있다. 늘, 인간이 정한 순서의 놀음 때문이다.


인간, 인간의 삶 속에는 언제나 순위가 있다. 순위를 정해야만 속이 시원했다. 동일한 순위는 그냥 넘길 수 없다. 경기에선 물론이고, 부의 정도, 성적을 정하는 순서 등, 반드시 순서를 정해야만 한다. 가위, 바위, 보라도 해야 하고, 목숨을 거는 내기도 해야 한다. 우연히 열차에서 옆사람과 인사를 한다. 곧바로 고향을 묻고 출신학교를 묻는다. 몇 학번이냐가 중요하고, 족보를 따져 손위를 가려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한 듯하다. 순서를 정하는 셈속엔, 인간의 성스러움도 있지만 간악한 추악함도 있다. 처절함이 녹아있고, 잔인함도 섞여 있다.

이런 일도 있고,

오래전부터 수채화를 해 왔다. 쉽게 생각했던 수채화, 거기에도 수많은 노력과 고뇌가 녹아있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림 한 점의 소중함을 감히 논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작가의 진한 땀과 고단한 노력이 배인 삶의 작품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작품,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성스런 예술품도 인간의 세계에는 보는 눈이 전혀 달랐다. 달라도 눈에 띄게 달랐다. 끝없이 고민하는 공모전, 왜 이렇게도 눈이 다를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눈들이 있었다. 누가 봐도 진저리 나는 다른 눈이었다.  공모전에 눈도 돌리지 않는 이유다. 인간의 아집과 영역 싸움이 치열해서다. 


우리의 삶에서도 수없이 만나는 일이 아니던가? 하나의 현상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는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 하나의 상황에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 여의도 상황이다.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하고 있다. 왜 이렇게도 생각이 다르던가? 초등학생도 판단할 수 있는 일을, 하늘에 놓고 땅에 놓는 형국이다. 친구는 정치를 하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란다. 사람과 같지 않음에 상대할 수 없다 한다. 고개를 끄떡이지만 정치도 삶이니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경쾌한 경기도 있습니다.

인간의 서열 속엔 기쁨과 서러움이 녹아있다. 서열과 계급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삶의 세계에 서러움과 기쁨을 공정히 나누고자 하는 판단 기준이 있는 이유다. 상식이 있고, 규칙이 있으며 법률이 있다. 어디서나 지켜져야 하는 규칙과 법률, 어느 순간엔 공정을 위해 정한 규칙과 법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인간의 양심을 묻어 놓은, 설익은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욕심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가 한창이다. 감동과 삶에 기운을 넣어 주던 경기다. 감동과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한 진한 투혼이 발휘된다. 선수의 삶과 인생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몇 년을 기다린 것이다. 


공정한 판단으로 실력을 평가받고 싶다. 여기에 수많은 눈들이 고정되어 있다. 수도 없이 만났던 광경에, 세계인이 감독관이고 심판이 되어 있다. 경기가 시작됐다. 숨이 멎는 막상막하의 경기에 세계인들의 눈이 고정됐다. 숨 막히는 열전이 끝나고 순위가 정해졌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경기 결과다. 하지만 순위를 결정하는 쇼트트랙의 심판,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 번은 실수지만, 거듭되면 고의라 했다. 세계인이 의뢰한 공정한 심판의 잣대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처절하게도 세계인의 눈을 가리고 말았다. 공정함을 믿고 의뢰한 양심을 저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덮어 주는 눈이 내렸습니다. 

심판은 경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경기를 조율하고 도와주며,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명쾌하고도 칼날 같은 판단이 생명이다. 삶에는 공정을 위한 상식과 인간들의 합작품인 법률이 있다. 삶에는 심판이 있고 판단 기준이 있지만, 같은 상황을 너무도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한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인간이기에 실수를 한다. 인간이기에 인정하고 신뢰를 얻으면 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믿을 수 없다. 삶의 가치인 신뢰를 잃는 것이다. 신뢰를 잃어버린 곳이 어디 쇼트트랙뿐이겠는가?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동계 올림픽 경기 쇼트트랙에 열광하고 있다. 선수들의 값진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불안하다. 공정이 어떻게 무너질지 불안해서다. 하지만, 공정과 공평함이 무너짐은 어디 쇼트트랙뿐이겠는가? 갑자기 여의도 정치 판이 눈에 보인다. 국가의 수장을 고르는 국가 대사가 눈앞이다. 설익은 말잔치가 곳곳에 가득하다. 선거가 끝나면 기억도 못할 말들이 넘쳐난다. 믿을 수도 없는 말과 행동이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말들이다. 정치를 한다는 위대한(?)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쇼트트랙 경기에서 벌어지는 공정의 외침이 여의도까지는 들리지 않았을까? 하긴, 눈이 멀고 귀도 먹은 여의도엔 어림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쇼트트랙은 공정이 살아난 듯한데, 여의도엔 언제쯤 상식과 원칙이 살아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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