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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Mar 20. 2022

공작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봄이 오는 아침, 봄을 준비하는 공작단풍)

아침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훅 넘어온다. 엊그제 겨울을 알려주던 바람과는 느낌이 다르다. 손등을 간질이는 상쾌한 산바람에 손등을 깊숙이 들이 밀고 말았다. 피부에 닿는 전혀 다른 느낌이 계절의 신비함을 전해준다. 폐부를 찌른 듯한 쌀쌀함은 온데간데없고, 피부를 더 들이밀고 싶은 싱그러움이다. 누구도 방해함이 없는 고요함 속 아침이다. 고요한 골짜기에서 만나는 이 맛을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고요함 속에 만나는 싱그러움이다. 옷소매를 훌쩍 걷어내고 앞 산을 바라봐야만 했다. 아직 푸름은 없지만 산을 넘은 바람이 전해주는 아침 소식이다. 서서히 산 식구들이 등장한다. 어디서 왔는지 산새 한 마리가 산을 훌쩍 넘는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공작단풍이 보인다. 잔디밭을 호령하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공작단풍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름에서 시작해 붉음으로 치장했던 공작단풍, 지난겨울엔 고난의 세월을 맞이했었다. 아직도 지난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다. 곳곳에 누런 잎을 달고 있는 공작단풍이다. 봄에 작은 꽃 몽우리를 밀어냈던 공작단풍, 따스한 바람 따라 얼른 잎을 피웠다. 푸름이 자리 잡나 하는 사이, 어느새 잎사귀를 불려 놓았다. 하늘대던 잎사귀가 넓게 자리를 잡아 물을 들이며 공작단풍은 서서히 고고함을 드러냈다. 중력을 무시한 대단함을 자제한 공작단풍이었다. 서서히 붉은 잎은 대지를 향하는 느긋함을 보여준 것이다. 얇은 치마를 두른 여인네가 옷자락을 부여잡은 고운 자태다.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림에 옷깃을 여민다. 

지난 여름을 빛내준 공작단풍

곱게 차린 옷자락으로 대지를 덮으며 그윽한 자태를 드러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고 함이다. 심심하면 산새를 불러 주었고, 지나는 산바람을 맞아 삶을 주고받았다. 찾아오는 산새들 쉼터가 되고, 긴 산 그림자는 자주 찾는 단골 마실꾼이었다. 서서히 여름이 짙어지며 치맛자락은 더 치렁치렁했다. 푸름이 서서히 물을 들여가는 여름날이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이했고, 한 여름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한껏 몸집을 불린 가지가 지쳐갈 무렵에 가을이 왔다. 서서히 짙은 빨강이 찾아오고, 치맛자락은 절정을 이루어 갔다. 늘어진 붉은 옷자락은 넘실거렸고, 지나는 바람이 그냥 두질 않았다. 가느다란 바람도 기꺼이 받아주는 넉넉한 몸짓이었다. 고고한 공작단풍은 고요한 마당을 넉넉히 지켜주고 있었다. 서서히 마당에 가을이 찾아왔다. 


서서히 가을이 익을 무렵, 가을날의 넉넉함을 즐기는 계절이다. 붉음의 조화가 가득한 가을날이다. 붉은 고추잠자리 찾아오고, 꺽다리 코스모스가 진빨강으로 어울렸다. 붉음의 고귀함은 가을이 벌써 알려주었다.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붉음의 가을 놀이였다. 앞산이 그랬고, 뒤 산이 어울리는 붉음이었다. 하늘 속 고추잠자리가 넘실대는가 하면, 마당가에 코스모스도 빼놓을 수 없는 붉음이었다. 가을 속 붉음이 가득할 때 공작단풍의 고고함이 드러냈다. 하늘 속 붉음과 대지의 붉음을 이어주는 공작의 어울림이었다. 넘실넘실 춤을 추며 가을을 즐기는 사이 계절은 가을빛이 역력했다. 한참의 놀음으로 가을을 즐기는 사이 겨울이 골을 부렸다. 

가을 초입에 만난 공작

가을 속 붉음의 어울림이 부러웠나 보다. 갑자기 찬바람이 산을 넘은 것이다. 서서히 가을이 물러가고 천천히 겨울이 와야 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찬 바람은 겨울을 준비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넉넉한 가을을 즐기고 있던 공작은 날개를 떨굴 채비를 하지 못해 당황한 모습이었다. 넘실거리던 춤사위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넉넉한 가을 따라 붉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틈을 주지 않았다. 대지에 닿지 못한 붉은 잎사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겨울을 맞아 홀가분해야 할 가지에 누런 잎사귀가 그대로 열려 있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에 낙엽이 될 사이도 없었던, 붉음이 붙어 있는 것이다. 힘에 겨워 손을 놓은 잎사귀는 떨어지고, 혼줄을 놓은 잎은 그대로 겨울을 나고 만 것이다. 아직도 누런 잎이 긴 가지에 달려 있다. 


봄바람에 밀려 잔디밭에 들어섰다. 고고한 공작단풍의 품위를 세워 주기 위해서다. 곳곳에서 봄 냄새를 맛볼 수 있다. 훌쩍 키를 불린 산수유는 벌써 봄을 알았고, 뒤뜰 황매화도 봄을 알아차렸다. 잔디밭 곳곳엔 푸름이 가득하다. 대지를 뚫고 나온 잡다한 풀들이 고개를 들었다. 전원의 잔디밭이 벌써 고단한 노동의 계절을 알려주는 신호다. 벌써 잡초와의 씨름을 시작해야 한다. 서서히 샅바를 잡고 준비를 해야 한다. 잠시 혼을 놓고 있다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된다. 서서히 심호흡을 해야 하는 봄이 온 것이다. 산을 넘은 바람이 공작을 흔든다. 누런 잎이 나 몰라라 춤을 춘다. 더러는 떨어지고 손아귀를 움켜잡은 잎사귀가 바람에 펄럭인다. 유심히 바라본 공작단풍, 벌써 꽃망울을 이고 있다. 공작도 벌써 봄을 알아 차린 것이다.

가을을 붉게 수 놓았던 공작단풍

가지에 열린 누런 잎을 떨구어내야 했다. 손으로 잡은 누런 잎은 할 삶을 다한 지 오래다. 아무 힘도 없는 잎사귀는 계절의 변함을 벌써 알고 있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잎이 대지를 덮었다. 대지로 돌아가  공작을 타고 올라 힘을 주는 누런 잎사귀다. 가지런히 단장된 공작단풍엔 벌써 고귀함을 드러나 있다. 마디마디에 벌써 꽃망울이 맺혀있고, 줄기엔 어느새 물길이 따라 흐른다. 불끈불끈 튀어 오른 가지에 물이 흐르는 것이다. 서서히 흐르다, 힘껏 흘러내린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봄을 한껏 안고 있는 공작이다. 서서히 공작이 단장을 마칠 무렵, 밝은 햇살이 찾아왔다. 맑은 하늘을 가로질러 산을 넘어온 것이다. 완연한 봄을 안은 햇살이 넉넉함을 안겨주는 골짜기다. 서두러 봄을 준비해야 하는 골짜기다. 서서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푸른 여름을 지나 붉음의 가을을 맞고, 하얀 겨울을 또 맞이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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