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바다를 찾아서, 봄날엔 역시 간자미)
봄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 언제 봄 바다 구경을 가볼까? 며칠 전부터 아내와 망설이던 중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상쾌해 차비를 하고 나섰다. 동해안의 푸르른 바다는 힘을 주지만, 서해안의 드넓은 갯벌은 맛깔난 먹거리를 준다. 봄이면 한 번쯤 찾아 나서는 서해안이다. 봄이면 간자미가 그리운 장고항이 아닌 대천 쪽을 향했다. 봄이면 장고항의 실치와 간자미가 으뜸 아니던가? 하지만 오늘은 대천 해저터널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6927m에 이르는 보령 해저터널, 보령 대천항과 원산도를 이어주는 해저터널이다. 시원한 봄바람을 따라 서해안으로 향하는 길, 하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다. 몇 년간 지친 코로나라는 역병에 시달린 탓이리라.
코로나, 지겹도록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역병이다. 곳곳에서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서민들의 발걸음이 더 무거운데 나들이를 떠난다는 것이 불편해서였다. 하지만 어둠 속에 숨어 살던 삶, 가끔은 숨을 쉬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역병이 휩쓸고 있는 세상에 집무실을 옮기느니 마느니 혈투 중인 인간들이 안쓰럽기도 한 봄이다. 대천항에 도착하자 바로 해저터널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원형교차로를 돌아 진입한 해저터널, 사람의 흔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붐빌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역시 코로나 시국이 갈길을 막아서인가 보다. 어마어마한 지하터널을 지나는 차량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개통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중앙선을 통제하며 또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벌써 손을 봐야 하는 씁쓸한 해저터널인가 보다.
해저터널에 들어섰는가 했는데 순식간에 원산도에 도착했다. 엄청난 해저터널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을까? 차량 몇 대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난 생각이다. 燕雀安知 鴻鵠之志리오.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보다. 터널을 벗어나자 원산도의 시원한 바람이 맞이한다. 긴 터널을 통과해 만난 섬, 그래도 섬은 아기자기한 길이 제맛이 아니던가? 언덕이 있고 굽은 길이 있는 길이 제법 아니던가? 거기에 개나리가 피어있고 진달래가 지천인 곳이어야 더 좋다. 냉이와 달래를 캐는 시골 아낙 모습이 보고 싶은 섬의 풍경이다. 찔레꽃이 보고 싶은 한가한 섬이지만 세상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는 여행길이다. 새벽에 나오느라 허기가 진다.
점심, 무엇을 먹어야 할까?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늘 실패다. '좋아요'를 따라 가봐도 별 볼일이 없다. 자주 속아봤기에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봄 나들이니 봄 간자미가 아닐까? 상큼한 맛에 싱그러운 야채가 곁들여진 간자미 맛을 잊을 수 없어서다. 싱싱한 야채에 고소한 깨가 얹힌 간자미가 그리운 봄이다. 소박한 시골 식당, 투박스러운 손으로 썰어낸 간자미 무침, 미나리가 있고 상큼한 오이가 섞여 있다. 엇썰기로 나뉜 몸을 내어 준 파란 오이가 간자미와 함께 고추장과 어우러진다. 파랑과 빨강의 조화가 봄의 입맛을 돋워 준다. 고명으로 올라간 하얀 참깨가 입맛을 유혹한다. 시원한 소주 한잔과 만난 간자미가 봄을 기억하게 한다. 봄 간자미 생각으로 분주한 사이 아내가 말을 건다.
아내가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단다. 언젠가 찾아왔던 식당, 게국지가 생각난단다.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도대체 난 기억이 없다. 언제 게국지를 먹은 적이 있던가? 식당을 찾아 한참을 돌고 돌았다. 섬의 이곳저곳을 찾아 결국엔 찾아내고 말았다. 아, 맞다. 이 집었다. 식당을 보니 언젠가 왔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이리저리 생각을 더듬어 찾아간 곳, 게국지가 전문이란다. 주인장에게 맛있는 것을 묻자, 서슴없이 게국지를 추천한다. 간자미 무침을 먹어야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고 만 것이다. 맛은 걱정하지 말란다. 언젠가 안면도 백사장 게국지 맛을 꺼내자 그곳하고는 비교하지 말란다. 주인장의 맛에 대한 자부심에 할 말이 없다. 한참의 기다림 속에 게국지가 나왔다.
게국지, 게를 손질하여 묵은지와 호박을 넣어 끓인 서해안의 향토음식이다. 서산 시장에서 만났던 게국지가 생각난다. 시골스럽지만 잊을 수 없는 시원한 게국지였다. 붉게 익어가는 게가 수북하고, 굵직한 대하가 들어 있다. 넉넉히 익은 묵은지가 들어 있어 게국지 맛, 구수하고도 상큼한 맛이다. 한 냄비 가득한 게국지에 싱싱한 미나리가 자리했고, 갖은양념이 곁들여진 행복한 밥상이다. 여기에 곁들여진 갖가지 젓갈과 무침은 젓가락을 그냥 두지 않는다. 게딱지를 들어내고 발라먹는 게맛과 하얀 속살이 드러난 대하의 고소함은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통통한 하얀 살이 달착지근함을 주고, 미나리의 향긋함이 봄을 알려준다. 미나리 향이 입안에 풍길 때 구수한 게국지 국물이 맛을 돋운다. 멈출 수 없는 점심상과 한참을 노닐고 영목항으로 향했다.
하얀 햇살이 비추는 얕은 바닷가, 봄 햇살이 내려앉은 물살이 일렁인다. 쏟아지는 햇살을 되받아친 물결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부셔 눈을 감으니 바다는 어딜 가고 햇살만 반짝인다. 산을 넘은 바람이 살랑이는 바닥 가는 너그러운 봄날이다. 길가의 온갖 나무도 봄을 알았다. 솜털이 묻은 싹이 돋았고, 고운 꽃을 피웠다. 봄바람이 찾아온 바닷가는 겨울 바다와는 전혀 달랐다. 설렁한 바람에 섞인 따스함은 썰렁함을 이겨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서둘러 온 봄을 알려준다. 서둘러 원산도를 뒤로 하고 대천항을 찾았다. 오는 길을 되짚어 오는 해저터널에도 사람은 없다. 곡선이 아닌 직선 위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 모든 것이 편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이 물러갔고 편리함만 남아 있다. 한산한 해저터널을 지나 우회전하니 대천항이 바로 나온다.
대천항,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한 곳이다. 언제 찾아도 사람들로 가득한 수산 시장이 한산하다. 두어 사람만 서성대고 있을 뿐 사람이 없다. 해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더 많다. 여기저기서 사람을 부르지만 사람이 있는 곳이 두렵다. 인류의 역병 코로나가 만들어준 삶의 모습이다.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상인들의 하소연이다. 먹고살기가 힘들단다. 갑자기 봄 간자미가 생각났다. 후덕한 아주머니의 입심에 끌려 간자미를 주문했다. 게국지에 취해 배를 불렸으니 간자미 맛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간자미를 주문하면 양념과 야채를 함께 무쳐서 싸 준단다. 얼마나 다행이던가? 역시 살기 좋은 우리나라다. 싱싱한 봄 간자미를 들고 얼른 항구를 나오고 말았다. 나오는 길에 만난 해산물 시장, 한아름 사 오고 싶은 생각을 간신히 누르며 돌아와야 했다.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의 맛과 멋이 있다. 전국 곳곳을 헤매며 살아가는 여행길엔 먹거리가 가득하다. 싱싱해서 사고 싶고, 아이들 생각나서 또 사고 만다. 늘 서너 개의 냉장고가 헐떡거리는 이유이다. 이젠, 냉장고의 고통을 덜어주기로 했다. 적당한 양을 준비해 맛깔난 맛을 즐기기로 했다. 한 줌의 회와 한 끼의 봄 간자미만 사가는 이유이다. 남아서 먹어 줄 때를 기다리는 간자미와 회 몇 첨이 안타까워서다. 맛도 덜하고 풍미도 없는 간자미를 먹어야 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싶어서다. 오랜 세월 속에 얻어낸 삶의 지혜, 평생 경험으로 터득했으니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삶이기도 하다.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 길, 여기저기에 봄소식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이 봄의 여행을 몇 해나 더 즐길 수 있을까? 또, 쓸데없는 생각으로 정신줄을 놓고 있다. 잠시 놓은 정신줄을 가다듬고 서둘러야만 한다. 상큼한 봄 간자미와 회 한 접시가 시원한 소주 한잔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