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이 가득한 정원, 밥 티시아)
골짜기에 자리한 시골집 대문을 들어서면 우선은 손녀의 화단이 앞을 막는다. 아내가 손녀와 함께 심어 놓은 여러 가지 꽃들이 가득하고, 우측으로도 작은 화단이 또 자리하고 있다. 아내가 정성으로 가꾸는 화단이다. 밑으로는 노란 기린초가 자리를 잡았고, 옆으로 모과나무가 우뚝 서 있다. 여름까지도 서늘한 곳이라 늘 헛걸음만 하는 모과나무다. 다른 지역의 꽃이 질 무렵에야 꽃을 볼 수 있어 결국은 꽃을 지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설움을 겪는다. 늘 헛걸음을 하는 것이 안타까워 퇴비를 듬뿍 주지만 올해도 열매를 보기는 어려울 듯한 정원이다. 기린초가 노란 꽃을 피운 늦봄, 모과나무를 바치고 있는 두 무더기의 보랏빛 꽃이 있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다년생 콩과 식물 보랏빛 밥티시아다. 밥티시아의 두 무더기가 모과나무를 보호하고 있듯이 듬직하게 서 있다. 흰색과 노랑 그리고 빨강 밥티시아도 있지만 모과나무 옆엔, 고고하면서도 도도함을 풍기는 진한 보랏빛이다. 모과나무 밑이 들썩이던 초봄, 이름 모를 새싹들이 두터운 대지를 열어젖혔다. 무엇인가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작은 새싹들이다. 얼마 후 작은 기린초가 있었고, 큰 금계국이 있었으며 곳곳에 구절초도 있다. 연한 보랏빛 꽃을 피우는 꽃범의 꼬리도 있는데, 으뜸은 역시 밥티시아다. 야리야리한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 서서히 몸집을 불리더니 슬며시 꽃을 피웠다. 진한 보랏빛 나비 같은 꽃이 작은 바람에도 나풀대며 앙증스럽다.
두 무더기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밥티시아, 경쟁이라도 하듯이 아담한 정원을 지켜준다. 오래도록 보라색으로 정원을 지킨 꽃은 가을이 깊어지면서 서서히 잎을 거둔다. 여름내 꽃을 피우고 가을까지 버틴 줄기는 검은색으로 변해 안타깝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정원을 빛내줌이 고마워 그대로 두고 보지만, 겨울이 되면 큰 키를 지탱하지 못한다. 결국은 끈으로 묶어 몸을 지탱해 주지만 처절함이 안타까워 흔적마저 지워주곤 했다. 줄기를 베어 빈자리만 남아 있던 곳에 봄이 오면, 서서히 싹이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일 년을 끄떡없이 지켜주는 보랏빛 밥티시아다. 기어이 꽃을 또 피우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밥티시아 옆으로 보랏빛이 강한 꽃이 또 있다. 꽃 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과 같다는 붓꽃이다. 커다란 줄기 위에 보랏빛 꽃을 피웠다. 마치 나비가 바람 따라 춤을 추듯이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고 있다. 붓꽃을 창포나 아이리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단옷날 머리를 감는 창포와는 전혀 다른 꽃이다. 아이리스(Iris)란 붓꽃류를 총칭하는 서양 이름으로 우리에겐 붓꽃이라는 이름이 훨씬 아름답고도 친근하다. 어느 봄날, 아내와 함께 뒷산엘 올랐다. 시원한 바람 따라 오른 뒷산에는 많은 나물을 길러낸다. 취나물과 고사리 그리고 두릅이 가득한 골짜기다. 내려오는 골짜기에서 만난 보랏빛 각시붓꽃, 한 무더기의 보랏빛 꽃이 눈을 의심하게 한다.
아내는 기어이 또, 욕심을 내고 말았다. 화단에 예쁜 각시붓꽃을 심고 싶은 것이다. 할 수 없이 각시붓꽃을 몇 뿌리 캐다 화단에 심어 놓았다. 보랏빛 꽃이 가득 핀 것이다. 어떻게 저런 빛이 나올 수 있을까? 야리야리한 꽃잎에 빛이 통과할 듯이 투명한 꽃잎이다. 보랏빛 물이 흘러내릴 듯이 진한 빛이다. 여기에 아침 이슬이 앉은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듯 아름답다. 맑은 햇살을 머금은 자그마한 각시붓꽃이 넋을 빼앗고 만다. 한 무더기 보랏빛 각시붓꽃이 숨을 멎게 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선 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붓꽃이다. 보랏빛 꽃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단에 가득한 조팝나무가 꽃을 피웠다.
노랑빛을 내고 있는 황금 조팝나무와 일본 조팝나무다. 긴 꽃대에 우산 모양의 꽃을 피운 것이다. 연한 보랏빛으로 단장한 조팝나무가 꽃을 가득이고 있는 정원이다. 붉은빛에 연한 보랏빛이 올라앉은 꽃이 뜰을 가득 메우고 있다. 보랏빛 밥티시아 앞으론 작은 붓꽃이 자리하고 있다. 하루만 핀다는 작은 붓고, 등심붓꽃이다. 꽃의 중심부가 등황색이어서 등심붓꽃이라 한다고도 하고, 등잔의 심지를 닮은 붓꽃이라 등심붓꽃이라고 한다는 등심붓꽃이다. 연약한 몸매에 여섯 개의 꽃잎이 있고 중앙부에 황색으로 물들여진 붓꽃이다. 마치 부추와 같기도 한 등심붓꽃이 여기저기에서 꽃을 피우지만, 하루만 핀다고 하니 보기도 힘이 든 귀한 붓꽃이다. 가끔 만날 수 있는 꽃이 지고 난 자리엔 씨앗이 열리게 되고, 옆에서 꽃을 보여준다.
보랏빛을 가진 꽃은 또 있다. 작은 텃밭에 심어진 가지도 보랏빛 꽃을 피웠고, 아기자기한 제비꽃도 보랏빛 꽃을 피웠다. 잔디밭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제비꽃,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쯤 핀다는 꽃이다. 일명 오랑캐꽃, 춘궁기가 되어 오랑캐가 식량을 약탈하러 쳐들어올 때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어떻게 그렇게도 많이 번식했는지 잔디밭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뽑아도 뽑아도 그칠 날이 없는 제비꽃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온다. 돌아서면 올라오는 제비꽃이 보랏빛으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곳곳에서 보랏빛이 가득한 늦봄이 저물어 가는 사이, 올해도 서서히 반이 넘어가는 계절로 접어들었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여름으로 치닫는 골짝기가 조금씩 더워지는 한 나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