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곳곳엔 삶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오랜만에 자전거길, 자귀나무 꽃)

by 바람마냥

비가 올 듯 말듯한 토요일 오후다. 가끔은 앞산을 보며 생각 없이 앉아 있고도 싶다. 향긋한 커피 향속에 바라보는 앞 산은 싱그럽고 생동감이 있어서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것은 늘, 불편하게 생각하던 삶이다. 오늘도, 무엇을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 자연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무더운 오후지만 자전거에 올라 시원함을 맛보고 싶어서다. 비탈길을 내려가는 시원함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상쾌함이다. 어디서 이런 멋을 맛볼 수 있을까?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신나는 바람을 따라 내려가는 골짜기 들녘의 모습은 며칠 전과 확연이 달라졌다.


봄에 이르러 모를 심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널따란 들녘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연한 초록이 어느새 검은 초록으로 갈아입었고, 엉거주춤 서 있던 모가 뿌리를 내리고 벌써 으스대고 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폼을 잡고 있다. 자연의 신비함과 농부의 발길이 그대로 두지 않았나 보다. 벌써 검푸름으로 몸을 불리고 다락논을 덮어 버렸다. 논 자락이 가득하게 들어 찬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가한 뜸부기 한쌍이 깜짝 놀라 하늘을 가른다. 괜히 오후 한나절의 사랑을 방해했나 보다. 한참을 달려 언덕을 내려가는 길옆에 노란 한 무더기 꽃이 자리 잡고 있다. 시골 곳곳에서 자주 만나는 황금달맞이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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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어떻게 저런 빛이 나올 수 있을까? 대단한 빛깔에 눈길이 멎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황금달맞이꽃, 노랑물이 줄줄 흐를 것 같아 조용히 숨을 멈췄다. 혹시나 노란 물이 흘러 넘칠까 두려워서다. 밝은 햇살에 반짝이는 노랑은 어느 화가도 만들 수 없는 빛깔이다. 와, 저런 빛깔을 볼 수도 있음에 감사한 시골이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본 자전거 길, 따가운 햇살을 피해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오늘은 시골길 이곳저곳으로 접어들었다. 차를 운전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음이 편하다. 길이 없어도 걱정이 없고, 차를 만나도 두려움이 없다.


나갈 길이 없으면 되돌아서 나오면 된다. 차가 오면 살짝 비켜 있으면 된다. 삶은 그럴 수 없을까? 고단한 길을 가다 막히면 되돌아 나오면 되고, 거대한 장벽이 있으면 비켜가는 삶은 없을까? 힘차게 오르는 언덕,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경사길이다. 죽을힘까지 모아 오르는 언덕 너머엔 늘 아름다움이 있다. 꽃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아기자기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다. 페달을 밟아 오르는 언덕, 곳곳에 꽃이 피고 새들이 반겨주는 언덕이다. 고단함을 이겨낸 자전거길은 언제나 그랬다. 꾸준한 발놀림으로 올라선 언덕엔 새로운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르는 삶 중에도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으면 하는 사이, 안락함이 가득한 시골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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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귀에서 만난 평상엔 동네 어르신들이 있다. 더위도 피하고 고단함도 피하는 평상의 모습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자 얼른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느냐는 말에 응답을 했다. 엎드리면 코 닿는 동네란다. 고단한 근육을 달래며 달려온 거리는 20여 km,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란다. 스쳐 지나갈걸 괜히 인사했다는 생각이다. 하찮은 자전거길을 불편해하는 말투다. 그렇다. 더위를 무릅쓰고 논밭을 헤매는 시골 어르신들, 거기에 자전거를 끌고 어정거리는 모습이 반가울 리가 없다. 쓸데없는 짓거리로 어르신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나 보다. 얼른 인사를 하며 되돌아 나오는 길이 죄송스럽기도 하다. 얼른 페달을 밟으며 언덕을 도망치듯 내달았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바람까지 불어온다. 아직 갈길이 많이 남았는데 걱정이다. 온 길이 20여 km 정도이니 적어도 그 정도는 남아 있다. 서둘러 페달을 밟는 수밖에 없다. 굵어진 빗줄기 속을 달리는 시골길, 엊그제 심어 놓은 모가 논 자락에 가득하다. 하지만 곳곳엔 아픔도 도사리고 있다. 초봄에 심어 놓아 놓은 배추밭, 가뭄 때문인지 곳곳에 나자빠진 배추가 배를 드러내고 있다. 농부의 가슴을 보는듯해 가슴이 아프다. 오래 전의 아버지가 생각 나서다. 아,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었을까?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는 골목엔 아름다움도 있다. 뻘건 장미가 함박웃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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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음이 아니라 진한 빨강이다. 빨강이 담장을 가득 물들였다. 아, 어떻게 저런 빨강이 나올 수 있을까?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빗줄기가 굵어졌다. 서둘러 자전거를 몰고 도착한 곳은 가끔 찾아가는 시골 쉼터다. 빗줄기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쉼터는 누구든지 쉼이 필요하면 사용할 수 있다. 간신이 찾아간 쉼터는 한적하다. 앞으로는 널따란 들녘이 펼쳐지고 먼 곳엔 산이 가로막고 있다. 얼른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들녘은 한없이 평화롭다. 빗줄기가 굵어져도 걱정 없는 곳이다. 고단한 삶의 휴식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고단한 삶에도 한적한 쉼터는 만날 수 없을까? 한참을 바라보는 들녘은 아무 말이 없다.


먼 산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만났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검푸른 논 자락에 떨어졌다.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줄기가 싱그럽다. 자연이 주는 빗줄기와 인간이 만든 다락논의 조화가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참을 바라보는 들녘엔 우리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다. 아버지의 발걸음이 숨어 있고, 새참을 머리에 인 어머니의 발걸음이 스며있다. 논두렁엔 막걸리가 가득한 주전자를 든 어린아이도 있다. 누런 소가 풀을 뜯던 시골길이었다. 오래 전의 기억이 가득한 논 자락이다. 논 근처 곳곳엔 하얀 밤꽃이 피었다. 싱그러움과 성스러움이 가득한 밤나무다. 가을을 알차게 해 줄 소중한 밤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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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진 빗줄기는 기력을 다했는지 머뭇거린다. 올까 말까 망설이는 빗줄기가 잦아들어 자전거에 올랐다. 어느새 햇살이 찾아온 들녘이 밝아졌다. 빗줄기를 피해 잠시 쉬는 사이에 골짜기 모습이 바뀐 것이다. 굽이굽이 논길을 따라 달리는 자전거길이 새롭다. 길가엔 자귀나무가 분홍 꽃을 피웠다.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다. 물이 많아진 시냇물에 오리 가족이 나들이를 나왔다. 어린 새끼를 보살피는 어미가 있고, 먹이 찾아 물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새끼들이 대견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삶은 같은가 보다. 새끼를 보살피는 어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자전거 힘을 보태며 달리는 논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굽이진 골짜기를 참으며 넘어오자 평평하고도 아름다운 길이 나온 것이다. 토요일 오후를 심심치 않게 한 자전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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