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의 어울림이 빛나는 골짜기

(정원을 바라보면서)

by 바람마냥

새벽녘에 후두득 거리는 소리, 반가운 비가 오나 보다. 창문을 열까 말까를 한참 망설였다. 혹시, 비가 아니면 어쩔까? 두터운 이중창이 막아주는 자연과의 소리 단절은 인간의 오만함을 알게 하는 아침이다.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앞산의 서늘한 바람이 훅 넘어오는 아침, 반가운 비가 오는 골짜기다. 야~~~, 비가 온다. 그렇게 고대하던 단비가 오는데, 수량이 아쉽기만 한 가느다란 빗줄기다. 작은 비라도 오래도록 왔으면 기대하며 내려서는 잔디밭, 제법 물기가 내려앉았다. 촉촉함을 주는 촉감이 오랜만에 편안함을 준다.


잔잔한 물기를 머금은 잔디밭에 잡풀도 고개를 번쩍 들고 있다. 오랜만에 반가운 빗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인간이 정해 놓은 잡초, 잡초가 알면 서운해하리라. 누가 잡초이고 누가 알맹이란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눈을 흘긴다. 자그마하게 내린 비가 대지를 적셨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는 수량이다. 마당 끝 도랑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내려야 모를 낸 논 자락이 넉넉해진다. 어림도 없는 빗줄기가 오랜만에 오는 비라며 거드름을 피운다. 작은 텃밭에 있는 토마토도 비를 맞았고 고추밭도 간신히 목을 축인 아침 비다.

IMG_1769[1].JPG 개키버들

마당 끝 눈에 번쩍 하얀 서리가 내려있다. 하얀 서리, 그동안 몸을 움츠리고 있던 개키버들이다. 옆에는 만첩 빈도리도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다. 개키버들, 초봄에 이르러 초록으로 옷을 해 입었던 개키버들이다. 봄이 점점 깊어지면서 옷은 하양과 보랏빛이 섞이고 있다. 서서히 여름이 깊어지먼 아름다움을 더 할 것이다.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우아한 빛이 역력할 것이다. 치렁치렁한 몸매에 초록과 분홍 그리고 하양이 곁들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낼 개키버들이다. 누가 이름 앞에 감히 '개'를 붙였단 말인가?


개키버들이 알고 나면 서운해할 버들이다. 개복숭아, 개살구, 개키버들... 키버들이 가지 껍질을 벗겨 키를 만드는데 쓰이는 버들이다. 키버들보다 못하다는 뜻의 개키버들이니 개키버들이 좋아할 수가 없는 이름이다. 비록 키를 만드는 데는 키버들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아름다움이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있는 위엄이다. 조용한 산바람이 내려왔다. 머뭇거리는 개키버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살랑거리는 치마를 일렁이며 흔들어대는 몸짓은 어느 누구와 비교해 뒤질 리 없는 자태다. 잔잔한 봄비가 내리는 날, 물기를 한참 머금었다. 가느다란 줄기는 오는 비에 온 몸을 맡기며, 흔들면 흔드는 대로 온몸을 내주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홀연히 서 있는 개키버들이 안쓰러웠는지 하얀 만첩 빈도리가 얼른 깨어났다. 하얀 꽃을 피운 것이다.

IMG_1770[1].JPG 만첩 빈도리

마당 끝에는 말발도리가 두어 무더기 자라고 있다. 꽃이 지고 맺는 열매가 말굽모양이라는 말발도리다. 어느새 번식력을 내세워 잔디밭 언덕에도 자리 잡았던 말발도리다. 탐스런 하얀 꽃을 지우고 나자 허전했던 잔디밭이다. 허전함을 눈치챈 개키버들이 치렁치렁한 옷을 해 입었고, 만첩 빈도리가 꽃을 피운 것이다.


만첩 빈도리, 꽃이 겹쳐서 피는 꽃이다. 말발도리와 비슷하지만 줄기가 비어 있어 빈도리요, 꽃이 겹쳐 피었다고 해서 만첩이라는 만첩 빈도리다. 하얗게 치렁대는 오색 개키버들과 쌍벽을 이루는 만첩 빈도리가 꽃을 피워 으스대고 있다. 어렵게 내리던 빗줄기가 그만 숨을 멈추었다. 땅이라도 축축이 적시어주면 좋으련만, 미련만 남기고 멎어버린 골짜기다. 개키버들과 만첩 빈도리가 웃고 있는 사이, 점잖은 바위취가 활짝 웃고 있다.

IMG_1776[1].JPG 바위취가 꽃을 피웠다.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누워있던 바위취였다. 참취나 곰취와 같이 큰 키로 으스대지 않고, 납작 엎드려 살아가는 바위취다. 잔잔하던 작은 잎을 널따랗게 잎을 키워 하얀색으로 실물감을 칠하고 바위를 덮고 말았다. 하얀 줄무늬로 치장해 바위를 덮고, 신이 난 바위취는 땅까지 감싸 안았다. 야박스런 봄비도 원망하지 않고 가끔 내려오는 이슬에 감사해하는 바위취였다. 서서히 힘을 얻은 바위취는 땅으로 내려앉아 존재감을 보여 주더니 하얀 꽃으로 화답했다. 잔잔한 꽃대를 세우고 하얀 꽃이 가득 피어났다. 꽃잎에 연한 분홍이 잦아들었다. 수줍음을 가득 안은 바위취가 뒤뜰을 하얗게 밝혀주는 아침이다.

IMG_1794[1].JPG 하양과 분홍빛 패랭이 꽃

잔잔한 비가 내려오는 아침, 넉넉한 치마를 입은 개키버들은 오늘도 고고하다. 살짝 늘어진 치마를 여미고 바람결에 하늘거린다. 우두커니 서 있던 만첩 빈도리가 웃고 있는 사이, 납작 엎드린 바위취가 한껏 웃는다. 산을 넘은 작은 비에 깜짝 놀란 바위취다. 넉넉한 공작단풍 아래엔 하얀 패랭이 꽃이 피었다. 신비한 자연의 조화다. 붉음과 분홍으로 으스대던 패랭이 속에 하양이 나타난 것이다. 분홍과 빨강 그리고 하양 빛을 어우러지고 있다. 초록에 하얀 줄이 그어진 바위취, 겹겹이 껴안고 꽃을 피운 만첩 빈도리, 고고함에 도도함까지 겸비한 개키버들과 패랭이, 골짜기는 하양으로 가득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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