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지난 골짜기 밤엔 산뜻한 바람만이 오고 간다.

(장마철 골짜기의 추억, 뜰에 핀 나리)

by 바람마냥

오랫동안 망설이던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양동이로 내려 붓듯이 내리더니 갑자기 햇살이 비친다. 미친 듯이 내리던 빗줄기를 내일로 미루는가 보다. 긴 장마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오랜 가뭄이 주는 삭막함이 곳곳에서 보인다. 뜰앞 잔디가 자라길 머뭇거리고, 가느다란 도랑물이 간신히 숨을 쉰다. 벌써 잔디를 깎고 또 깎아야 할 즈음인데, 아직 한 번도 깎아주지 않고 더 자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여름의 중턱으로 들어가는 계절,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친 골짜기 밤은 조용하기만 하다.


먼산 뻐꾸기는 아침부터 울어댄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밤이면 밤대로 울고, 아침이면 또 아침대로 울고 있다. 가끔 하늘을 날며 뜬금없이 울어대던 뻐꾸기가 오늘도 아침을 알려주는 골짜기다. 싱거운 아침 닭이 길게 목을 늘이자 언제나 닭과 함께 하는 이웃이 말을 건다. 닭에게 안부를 묻고 동네 지킴이에게 밤새 잘 있었느냐는 아침인사다. 저렇게도 정스러운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정스런 인사를 나누고 앞산으로 오른다. 앞 산 중턱엔 이웃이 가꾸는 텃밭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네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이웃이다.

IMG_1938[1].JPG 밤에 만난 뜰은 화려하다.

정스런 이웃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앞 산 중턱에 심어 놓은 토마토와 이야기하고 옥수수의 안부를 묻는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슬을 맞고 다소곳이 커가는 것이 신기하다. 자연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늘 하는 골짜기다. 작은 씨앗을 심어놓았는데 엄청난 크기의 옥수수가 달리고 토마토가 붉게 익어간다. 검은 줄이 그어진 수박이 여기저기에 뒹굴거린다. 아침마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반가워하는 이유다. 벌써 하얀 안개가 산을 넘었으니 오늘도 엄청난 더위가 기다리고 있나 보다.


앞산의 안개로 봐선 장마가 잠시 쉬어 갈 모양이다. 밤새 내린 빗줄기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우선은 명맥만 유지하던 도랑물이 풍성해졌다. 콸콸은 아니더라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를 그리도 서두르는지 빠르게 내달린다. 주변의 온갖 잡동사니를 끌고 내려가 어느새 도랑이 깨끗해졌다. 아침부터 깨끗함으로 인사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서두르는 발걸음이 먼 길을 가야 하는 아낙네의 발걸음이다. 하얀 치마를 부여잡고 앞만 보며 내달리는 걸음걸이다. 도랑 주변이 넉넉한 빗물 자국이 마음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아침이다. 자그마한 초가지붕 위로도 장맛비가 내렸었다. 어머님과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초가집이다.

IMG_1859[1].JPG 황금 낮 달맞이꽃(밤엔 꽃잎을 닫는다)

텃밭을 서성이던 어머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옥수수 잎에 여름 매미가 장맛비에 깜짝 놀라 날아가고, 어머니는 하얀 수건 휘두르며 대문으로 내닫게 하는 여름 비였다. 먼 산에 밝은 햇살이 머물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장맛비였다. 사선으로 바람을 타고 내리는 장맛비, 곡예를 하듯이 하늘 밑을 일렁인다. 꼬리를 감추는 듯하더니 다시 나타나고, 끊어질듯하다 끊어짐이 없다. 아버지는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신다. 길게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삶의 고단함을 알려주는 듯했다. 산을 넘은 장맛비에 모든 것인 정지 되었다. 빗소리만 남아 있는 시골 동네가 한적한 한 나절이다.


논 일을 놓아야 하고, 밭일도 잠시 쉬어야 했다. 빗줄기를 핑계로 잠시 쉼에도 할 일은 태산같이 남아 있는 여름이다. 핑계 김에 낮잠으로 한 나절을 보냈지만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할 일은 그냥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김을 매던 채마밭을 뒤로하고 들어선 집, 어머니는 다시 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밥을 지어야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장맛비가 내려 들일은 멈추었지만 집안일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잠시 내린 비로 집안일을 해도 들일이 남아 있음에 불편하다. 오래 전의 당신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장맛비다.

IMG_1969[1].JPG 고요한 정적만이 골짜기를 지키고 있다.

따끈한 햇살이 넘어온 골짜기에 여름이 깊어졌다. 푸름은 푸를 대로 짙어 검푸름을 가득 물들였다. 논두렁이 가득해졌고 어느새 참깨가 분홍빛 꽃을 피웠다. 엊그제 심어 놓은 참깨가 밭을 가득 덮고 꽃을 피운 것이다. 비탈밭에 줄푸름으로 여름을 알려준다. 비탈밭엔 개망초가 하얗게 꽃을 피웠다. 농사를 지을 땅이 개망초를 키워낸 것이다. 농촌의 현실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느닷없이 여름 뻐꾸기가 하늘을 날아간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뻐꾸기가 날아가나 했는데, 뜬금없는 고라니가 짝을 찾지 못했는지 긴 울음을 울어댄다. 산새들은 무슨 말인지 여전히 수다를 떨고, 갖가지 산 식구들이 이곳저곳으로 드나드는 골짜기다.


잠시 장마가 주춤하는 사이, 골짜기에도 어둠이 찾아들었다. 서서히 어둠이 물 드는 골짜기엔 멀리 개구리가 울어대고 뜰앞 도랑물이 장맛비에 부자가 됐나 보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어느새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따금 소쩍새가 운율을 넣어주는 앞산은 정막 하기만 한데, 간간이 오가는 자동차 불빛만이 사람 사는 동네임을 알려준다. 긴 도랑을 따라 들어선 언덕에는 밝은 나리가 밝은 꽃을 피웠고, 낮에 환하게 웃던 황금 낮 달맞이꽃도 입을 꾹 다물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나리꽃도 졸고 있고, 한가한 가로등만이 골짜기를 지키고 있는 고요한 여름밤이다. 장맛비가 지난 골짜기에 산뜻한 바람만이 오가는 밤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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