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리는 날, 백일홍)
햇살이 산을 넘은 아침은 상쾌하다. 에어컨이 필요 없는 골짜기, 엊저녁엔 이불을 덮고 자야 했다. 아침에 맞이하는 바람도 여름날에 내려온 바람이 아니다. 싸늘하지는 않아도 서늘하다는 바람이다. 장마철의 날씨야 장담할 수 없지만, 햇살이 밝으니 당연히 비가 오지 않을 날씨다. 오래전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소의 한 등짝은 비가 오더라도 남은 한 짝은 멀쩡한 게 장마철이란다. 그랬다. 근처 도시에는 물 폭탄이 쏟아지는데도 골짜기엔 비 한 방울 소식이 없다. 엎드리면 코가 닿을 두 동네다.
밝은 햇살이 반짝이나 했는데 난데없이 구름이 오고 간다. 참새는 오늘도 쉼이 없다. 입에는 무엇을 물고 있어 입을 다물었나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지껄인다. 새는 참 신기하기도 하다. 입에 새끼줄 먹이를 물고 있었어도 짹짹거린다. 용케도 입에 문 것은 그대로 있다. 잔디밭과 처마 밑을 오가는 속도가 대단하다. 집주인의 눈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끔 눈치를 보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떼 지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도 잔디밭에서 잘 놀고 있다. 오후가 되었다.
앞산을 구름이 덮었나 했는데 먼 곳에는 햇살이 보인다. 산 언덕에는 안개가 아스라이 얹여 있다. 대관령을 바라보는 듯한 앞산 안개다. 서서히 안개가 물러가나 했는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 아내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오전 내 널어놓은 빨래를 걷기 위해서다. 한두 방울 떨어지나 했는데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온다. 어! 하는 사이에 물 폭탄이 쏟아진다. 이층 창문을 닫아야 하고, 뒤 창고문도 닫아야 한다. 아내는 빨래 때문에 허둥거리는 사이 문을 닫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현관에서 바라본 앞산은 그냥 아름다운 풍경이다. 만날 수 없는 행복한 풍경이다. 오래전 그리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은 좋다. 긴 장마가 아닌 가끔 내리는 비가 좋다.
비가 오면 어머니가 집에 계시고, 툇마루엔 아버지도 계신다. 당신들의 고단함을 쉴 수 있어 좋았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부침개를 하셨다. 울타리에 앉은 푸른 호박을 숭숭 썰어 넣은 부침개다. 아버지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셨다. 술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 아버지, 오로니 물 한 사발이면 족했다. 호박과 풋고추가 섞인 부침개, 텁텁한 막걸리가 한잔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얼큰한 얼굴로 삶을 쉬이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식구들을 건사하기보단, 세상을 쉬이 바라보는 당신의 삶을 가끔 바랬지만 모두 헛된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지금도 좋다. 서둘러 운동을 나서지 않아도 되고, 잔디밭에 잡초를 뽑지 않아도 된다. 느긋하게 앉아 아내와 커피 한 잔이면 하루가 편안하다. 앞산 모습이 수시로 변한다. 한쪽은 뿌연 안개가 얹혀있지만 이웃에는 장대 같은 빗줄기다.
장대 같은 비가 사선으로 내린다. 바람을 타고 내려온 비가 산등성이를 오고 간다. 직선이 곡선이 되고, 곡선이 다시 직선이 되어 산을 덮는다. 굵었던 빗줄기가 가느다란 빗줄기로 변했다. 한쪽 산엔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저쪽에는 가느다란 빗줄기다. 참, 신비한 장마철의 빗줄기다. 뒷산 빗줄기 소리가 요란스럽다. 갑자기 나무라도 쓰러질듯한 빗소리다. 얼른 나서 바라보는 언덕 밭엔 개망초가 하얗게 꽃을 피웠다. 개망초가 저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 뒷산을 덮었고, 느닷없이 내린 장맛비가 모습을 달리 한다. 참새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지붕에 앉아 눈치를 본다. 집으로 들어갈까 마실을 나갈까? 기어이 먹이를 새끼에게 먹이고 휙 날아간다.
쏟아진 빗줄기에 잔디밭에 놀던 참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새 없어졌는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전깃줄에 두 마리가 나타났다. 나란히 앉아 뭔 할 소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연신 지껄인다. 앞 산 중턱엔 뿌연 안개가 휘감고 있다. 대관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앞산의 모양이다. 벌목을 한 산은 가지런한 푸름이 있는가 하면, 남은 산은 짙은 녹음이 덮고 있다. 미끄러질 듯이 내리는 장맛비의 모양도 다르다. 짙은 녹음 속 빗줄기는 짙은 하양이지만, 다른 산에 내리는 빗줄기는 희미하다. 푸름이 주는 싱그러움이 빗줄기의 모습을 달리한다. 망초꽃이 만발한 뒷산으로 눈을 돌렸다.
높은 산 말랭이에도 안개가 휘감고 있다. 푸르른 낙엽송이 짙은 푸름을 하고 있는 곳, 여지없이 장맛비는 짙은 푸름을 덮고 있다. 굵은 빗줄기가 푸름을 덮나 했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줄어든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산을 넘는가 하더니 오던 비가 점점 쇠약해진다. 굵은 비가 가늘어지고, 가늘던 비가 굵어진다. 갑자기 비가 그치더니 햇살이 넘어왔다. 빗줄기가 줄어들고 가느다란 햇살이 화살처럼 앞산에 꽂힌다. 어! 하는 사이에 산의 모습이 달라졌다. 뚜렷한 산의 모습이 나타나며 비 온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서서히 사람들이 서성이고, 산새들이 나타난다. 재빠른 참새는 잔디밭을 오고 간다. 이층 서재 앞을 서성이며 다시 눈치 싸움이다.
골짜기 동네는 비가 그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웃들이 나와 도랑가를 서성이고, 숨죽이고 있던 이웃 닭이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저만 알을 낳은 듯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이웃 닭이 품앗이로 울어준다. 고요한 골짜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익숙한 소리다. 산을 넘은 작은 바람이 앞 산을 간질이니,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빗물을 털어낸 푸름이 버거움을 이겨낸 후련함에 긴 숨을 내쉰다. 잔디밭에 참새들이 다시 찾아왔다. 여전히 처마 밑을 오고 간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가 햇살에 빛이 나고 비 내린 골짜기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장맛철 내리는 비가 조금 더 왔으며, 앞 도랑은 몸집을 불려 체면을 차리고 큰 소리를 칠 텐데! 작은 아쉬움이 남는 골짜기 장맛비는 아늑한 쉼을 주며, 추억 속의 기억을 꺼내 준 진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