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비 내리는 날, 앞산의 불당 나무)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대는 여름날, 산을 넘은 바람이 심상치 않다. 구름이 하늘 밑을 오가면서 햇살이 넘는 길을 막았나 보다. 오후 한 나절, 흐릿한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비를 잔뜩 안고 산을 넘어온 것이다. 세차게 녹음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여름 비가 내린다. 푸름을 가득 먹은 앞산에 사정없이 내리는 여름 비다. 비스듬히 그리고 가끔은 좌우로 흔들며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다. 오래전 툇마루에서 바라보았던 비의 모습이다. 자연의 신비함에 또 놀라고 만다. 비를 몰고 온 먼 산은 안개가 덮고 있다. 거센 빗줄기가 서서히 힘을 잃었지만 아직도 여름 비는 앞 산을 흔들고 있다. 여름 비가 오는 여름날, 어디선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감나무 밑의 초가집 뒤뜰엔 작은 마루가 있다. 안방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면 닿을 수 있는 마루다. 옆으론 커다란 쌀독이 놓여 있고, 쌀독 위쪽으로는 작은 다락이 있다.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다락이다. 자그마한 마루는 언제나 평화로운 곳이다. 앞에 있는 마루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시원함을 준다. 가끔은 뿌연 먼지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고즈넉한 툇마루다. 바쁜 농사철이지만 비가 오는 오후, 농사일로 고단함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다. 야트막한 토막을 베고 옆으로 누워 곤한 잠이 든 것이다. 고단함을 당할 길 없는 늙으신 아버지, 코라도 골아야 하는 오후다.
아침나절 논으로 나섰지만 굵어진 빗줄기를 이길 수 없었다. 서둘러 도롱이 덕을 보며 도착한 안락한 집이다. 채마밭을 돌보시던 어머니는 서둘러 밥을 해야 했다. 열무를 뜯고 갓자란 오이를 따 점심상을 차려야 했다. 비스듬히 썬 오이에 초고추장이 얹힌 오이 무침과 열무를 이용한 겉절이가 곁들여진 점심상이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오신 아버지, 점심 상을 물린 후에 든 고단함이었다. 간간히 감 나뭇잎에 머물던 빗물이 떨어진다. 무심코 툭하고 떨어진 빗방울은 대지 위에 작은 구멍을 만든다. 곳곳에 물방울 자국이 선명한 감나무 밑, 덩달아 떨어진 풋감이 널려 있다. 오래 전의 고향을 기억하게 해 주는 추억의 여름 비다.
여름 비가 내리는 앞산의 녹음들은 비를 맞이하는 자세가 다르다. 삶의 모양이 다르듯이 그들이 모습도 다양하다. 긴 줄기를 내민 소나무는 끄떡도 없다. 올 테면 와보라는 듯이 흔들림 없는 소나무다. 빗방울이 잎에 달려 있어도 어림도 없는 모습이다. 소나무의 자존심을 지키려나 보다. 하얀 꽃을 피운 밤나무는 전혀 다르다. 하얀 꽃 때문인지 작은 빗줄기에도 몸을 흔들린다. 하얀 꽃이 아래 위로 오가고, 널따란 잎은 바람 그네를 탄다. 어느새 하얗게 꽃을 피워 앞산을 가득 덮고 있는 밤나무, 알찬 가을을 기약하는 밤나무다. 작은 열매를 달고 있는 벚나무는 조심스럽다. 자잘한 버찌가 떨어질까 걱정스러운가 보다. 자잘한 버찌에 물방울을 달고 조심스레 바람 그네를 탄다. 검게 읽어 가는 버찌가 가득한 벚나무는 사연이 많다.
초봄에 하얀 꽃을 피웠던 벚나무가 꽃을 털어냈다. 꽃을 지워내고 푸른 잎이 나오면서 초록의 버찌를 달았다. 아침 이슬과 햇살을 머금고 작은 버찌는 점점 익어갔다. 어느새 알고 찾아온 산까치가 그냥 두질 않았다. 용케도 익은 버찌를 알아내고 용서가 없다. 검은 것만 골라 먹어대는 산까치들, 조석으로 발걸음이 잦았다. 흔들리는 가지에 온몸을 맡기고 앉아 익은 열매만 따 먹는다. 산까치의 먹이를 피한 버찌는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한다. 간간히 오가는 차량을 피하지 못해 도로를 검게 한 버찌다. 햇살과 비바람을 이겨내고 검붉게 익어가는 버찌다. 대롱대롱 달린 물방울이 위태위태하다. 키가 껑충한 낙엽송도 바람 따라 운율을 탄다.
껑충한 키에 자잘한 잎을 달았다. 얼마나 가지를 길게 늘였는지 작은 바람도 이길 수 없다. 긴 가지에 달린 작은 잎들, 비바람을 이겨낼 수 없다. 아래위로 그네를 타며 가지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낸다.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앞산의 한여름 소리다. 기다리던 여름 비가 땅을 흥건하게 적시었다. 가뭄으로 목마르던 대지가 흥건한 물줄기를 마시고 있다. 작은 앞 도랑도 신이 났다. 근근이 살아온 도랑물, 내려준 빗줄기를 반기는 이유다. 조금은 넉넉해진 도랑물이 힘을 얻었다. 서서히 빗줄기가 줄어들고, 먼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작은 햇살이 찾아온 골짜기다. 순식간에 변한 여름 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골짜기다.
서둘러 잠을 털고 들로 나서야 하는 아버지다. 서둘러 물꼬를 봐야 하고, 텃밭에 물줄기를 잡아 줘야 한다. 때가 있는 농사일이기에 잠시도 미룰 수 없다. 갑작스러운 여름 비에 봇도랑에 흐르는 물이 거세졌다. 철없이 자라난 도랑가 풀이 여름 비를 이기지 못했다. 물길에 따라 누워 흐르는 물에 일렁인다. 채마밭도 모습이 변했다. 넉넉한 빗줄기에 대지는 촉촉하다. 채마밭 가장자리 옥수수 잎도 물기를 털어낸다. 깜짝 놀란 매미가 하늘 속 점이 된다. 채마밭에도 맑은 햇살이 찾아왔다. 넉넉하게 자란 열무는 목을 축이고, 찾아온 햇살에 물기 먹은 잎이 반짝인다. 시원함을 달래주는 여름 비가 오간 초가집은 여전히 조용하다. 가끔 감나무잎에 머물던 빗방울, 툭 떨어지며 무심코 정적을 깨워주는 여름날의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