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뜨락, 수국이 피었다.)
장마가 지나 간 자리는 깨끗하다. 골짜기 산이 그렇고, 나뭇잎이 그러하며 높은 하늘도 깨끗하다. 골짜기를 오가는 산새들도 신이 난 듯 오가는 평화스러운 골짜기다.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문 참새 한 마리가 창문 앞을 서성인다. 누가 주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눈치싸움이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두 집주인 간의 신경전이다. 산뜻한 앞산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이층 서재 앞 풍경, 서재가 처마 밑 둥지를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슬쩍 자리를 피해주자 얼른 둥지로 향했다. 집세도 받지 않는 집주인의 너그러움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내려간 골짜기는 벌써 부산하다. 산새가 잔디밭을 서성이고 아내는 벌써 운동을 시작했다.
뜰로 내려서는 곳에 하얀 비닐봉지가 놓여있다. 봉지 안에는 몇 개의 복숭아가 들어 있음은 이웃이 놓고 갔음을 금방 안다. 이웃 간에 자주 있는 일로 주고받는 인정이 넘치는 골짜기다. 며칠 전에 깎아 놓은 잔디밭이 말끔해 좋다. 참새들이 잔디밭을 앉아 열심히 먹거리를 찾는다. 갖가지 곤충들이 가득한 잔디밭은 참새들의 보물 창고다. 새들이 온종일 잔디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말끔한 잔디밭 가장자리엔 자잘한 꽃들이 활짝 피었다. 비가 오고 난 후라 더 산뜻하다. 우선은 분홍빛 수국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얼마 지나면 꽃이 가득할 꽃범의 꼬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에 숨어 있던 수국이 밝게 꽃을 피웠다. 밝은 분홍빛이 신비롭다.
뒤뜰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산수국이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잔디밭에 있던 수국이 분홍빛 꽃을 피운 것이다. 산수국과 비슷한 불당 나무가 꽃을 지웠고, 불두화도 꽃을 지운 지 오래다. 뒤뜰을 환하게 해 주던 꽃들이다.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꽃범의 꼬리가 넓게 자리를 잡았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었더니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기에 올해는 물을 아끼기로 했다. 하지만 수국 근처 꽃범의 꼬리는 여전히 키를 불렸다. 물을 좋아하는 수국을 위해 물을 자주 주었기 때문이다. 보랏빛 꽃을 피운 수국 근처로 다복하게 자란 꽃범의 꼬리가 보기 좋은 아침이다. 시골집으로 이사하고 자라 집은 자그마한 꽃밭이 있다. 이름하여 손녀의 꽃밭이다.
가끔 찾아오는 손녀가 할머니와 함께 가꾸어 오던 꽃밭이다. 봄이면 수선화가 피고, 금낭화가 만발하던 꽃밭이다. 어느새 할머니가 심어 놓은 백일홍이 꽃을 피웠다. 오래전 어머님의 꽃밭에서 만났던 백일홍이다. 붉은빛을 발하는 백일홍이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무슨 꽃이든지 심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올해도 꽃사랑을 멈출 줄 모른다. 어느새 심어 놓았는지 붉은 맨드라미도 꽃을 피웠다. 붉은 꽃을 피웠지만 붉은 꽃대에 붉은 꽃을 피워 어느 것이 꽃인지 알 수 없는 맨드라미다. 여기에 분꽃만 있으면 어머니의 꽃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손녀의 꽃밭이다. 곳곳에 여름을 장식할 꽃들이 가득하다.
주황빛 나리도 꽃을 피웠다. 껑충한 키에 주황빛 꽃을 달고 바람에 일렁인다. 벌써 꽃을 지운 밥티시아에 주체할 수 없는 몸을 기대고 있다. 서양톱풀이 붉게 빛나는 꽃을 피우자 서서히 달맞이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껑충한 키에 노란 꽃을 달고 언덕을 호령하고 있다. 번식력 하면 뒤질 수 없는 것이 구절초이다. 지난해에는 몇 송이만 피우고 말았던 구절초가 엄청난 번식력을 과시하고 있다. 끝내 곳곳을 하얀 꽃으로 장식할 태세다. 마당 끝 언덕 돌 틈을 비롯해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올해는 하얀 꽃으로 마당을 장식할 구절초가 기대되는 아침이다. 여름이 깊어지면 곳곳에 꽃 천지가 될 것이다.
울 밑에 자란 봉숭아가 꽃을 피우면 방학을 맞은 손녀가 찾아오리라. 할머니와 함께 손톱에 물을 들이는 날이면 여름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다. 봉숭아가 시들해질 무렵엔 곳곳에 자리한 달맞이꽃이 기다리고 있다. 노란 꽃을 달고 고요한 달빛을 즐길 것이다. 도랑가 황금 낮달 맞이 꽃과 어울려 메리골드도 꽃이 한창이다. 길게 심어진 메리골드가 노랗게 물들고 황금낮달맞이 꽃이 동네는 밝게 빛내고 있다. 이웃들과 어울려 장식한 꽃길이다. 조용한 곳에 자리한 나의 집터 풍류정이 꽃으로 가득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마당 끝에는 구절초에 버금가도록 아름다운 개미취가 고요하게 꽃을 피웠고, 서양톱풀도 화려한 색으로 외출을 했다. 현관으로 오르는 양옆에 우두커니 서서 집을 지키는 주목이 있고, 양옆으로는 서양톱풀과 국화가 자리를 잡았다. 국화 옆으로는 일본 조팝나무가 가득 가지를 늘여놓고 있다. 분홍과 붉음이 적당히 섞인 서양톱풀이 산을 넘은 바람에 일렁이는 사이, 일본 조팝나무가 다복한 꽃을 일렁인다. 언제나 서양톱풀과 대비되는 일본 조팝나무, 다복한 꽃을 피우고 주목을 지켜주고 있다. 계단을 지켜주는 여러 화분에도 꽃은 가득하다. 피우기 힘겨운 선인장이 꽃을 달고 있고, 늦은 금계국도 꽃을 피웠다.
장마가 주춤한 사이에 골짜기에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자리 잡은 시골집이다. 아침마다 잡초를 뽑아야 하는 번거로운 듯 하지만 번거롭지 않은 일이다. 신선한 바람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산을 넘은 반가운 바람이 찾아오고, 처마 밑에 자리 잡은 참새가 반겨주는 아침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가 붉게 익어가는 아침, 이웃들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작은 먹거리라도 나눠먹는 이웃들이 있고, 내 집을 제집인양 드나드는 참새들이 가득하다. 가끔 산을 넘은 산바람이 시원하고, 장마 덕에 몸을 불린 도랑물 소리가 경쾌한 골짜기다. 아침마다 싱그러움을 안고 시작하는 하루가 늘 풍성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