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는 오늘도 살아서 숨을쉰다.

(아침을 맞이하는 풍경,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by 바람마냥

긴 장마가 물러간 사이, 골짜기에 짙은 안개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햇살과 함께 찾아온 안개는 여기가 산골짜기임을 알게 해 준다. 새벽부터 어김없이 질러대는 소리는 이웃집 닭이 우는 소리다. 새벽이 왔다고 알려주고, 수탉이 위세을 보이려 질러댄다. 같은 울음소리지만 듣기에 따라 높낮이가 다르다. 맑은 날엔 높은음이 절로 나지만, 구름이 끼면 낮게 깔리는 축축한 소리다. 암탉이 알 낳은 소리는 다르다. 중간 높이의 음으로 한없이 울어댄다. 순식간에 떼창이 울려 퍼진다. 알 낳은 닭이 울면 이웃 닭이 울어준다. 품앗이로 울어주는 얽히고설킨 떼창이다. 어울림도 조화도 없는 엉망진창 음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울어대다 순식간에 멈춤이 있다. 질서가 있는 듯한 신기한 멈춤이다.


닭의 울음에 이어 참새가 재잘댄다. 뭔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걸으면서 지껄이고 먹이를 물고도 재잘댄다. 하나의 입이니 천만다행이다. 만약 입이 두 개였으면? 참새는 좋지만 골짜기는 난리 북새통이었을 것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 처마 밑에 둥지를 널름 틀었다. 새끼를 부화한 후엔 새벽부터 먹이를 물어 나른다. 어린 새끼가 입 벌리고 재잘대기 때문이다. 어찌나 짹짹거리는지 정신이 없다. 아무리 손사래를 처도 못 들은 척한다. 그들의 터에 들어와 사는 나이기에 할 말도 없다. 봄부터 소란을 피워 이제야 새끼가 날갯짓을 한다. 다행이다 싶지만 처마 밑을 떠날 생각은 없나 보다. 함께 사는 수밖에 없는 골짜기다. 여기에 매미가 한 소리 거든다.

안개 찾은 앞산에 해가 찾아왔다.

장맛비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매미, 장맛비가 뜸해지면서 처절한 울음이다. 새벽부터 울어대기 시작한 소리는 끝이 없다. 긴 기다림 끝에 태어난 매미의 삶이다. 고독한 수컷이 암컷을 찾아 처절하게 울고 있다. 저렇게도 긴 울음은 더울수록 간절하다. 오늘 안에 기어이 짝은 찾겠다는 생각인가 보다. 높은 음의 간절함도 있지만 저음의 듬직한 소리도 있다. 가느다란 소리에 높은음이 있고 굵은 소리에 낮은 음도 있다. 배부분을 들썩이며 울어대는 처절한 소리다. 한 번에 우는 소리도 아니다. 취향에 따라 내는 소리라 시작도 다르고 끝도 다르다. 어울림이 있을 수 없는 엉성한 떼창이다. 드디어 동네 지킴이들이 참여했다.


맥칼 없이 한 마리가 짖어대면 떼창이 이어진다. 여러 곳에서 소리가 이어지며 난리가 났다. 지킴이들이 지키려 우는 소리가 아니다. 본연의 의무에 충실함이 아니다. 이웃에서 나는 소리 따라 그냥 짖어대는 소리다. 이웃에서 질러대는 그야말로 개소리다. 닭이 울면 짖어대고 달이 떠도 짖어댄다. 느닷없이 새가 날아도 짖어댄다. 인기척엔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슬며시 든 머리에서 컹컹 울리는 소리다. 한없이 짖어대다 힘이 들면 그만이다. 기분 따라 짖어대고, 내키지 않으면 멈추는 소리다. 골짜기를 울려대는 개소리가 한참 이어지다 끝낼 무렵엔 고라니도 빠질 수 없다. 짝짓기를 위한 소리란다.

맑은 이슬이 찾아왔다.

서재에서 보이는 산 말랭이엔 넓은 비탈밭이 있다. 동네 할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터다. 구부러진 허리로 언제나 앉아 계신 할아버지였다. 넓은 비탈밭에 잡초가 가득하던 지난해,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신다. 따가운 햇살 아래에도 쉼이 없는 풀 뽑기였다. 한 포기씩 뽑아나간 비탈밭이 어느새 훤해졌다. 수북이 쌓인 풀이 할아버지의 고단함을 알려준다. 고단함을 이겨낸 할아버지, 오래전 나의 아버지였다. 힘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놀이 같았던 일, 멀리서 바라봄이 눈물 나는 노동이었다. 어째서 쉼이 없으실까? 시원한 냉수 한 사발 드리고 싶은 심정, 아버지를 보는 그리움이었다. 올해는 지난해와는 달리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쩐 일일까? 몹시도 궁금해했지만 할아버지는 건재하셨다. 비탈밭을 던져두고 평평한 이웃 밭에 전념하신다. 긴 밭고랑을 따라 풀을 뽑으신다. 역시, 더워도 쉼이 없고 비가 와도 그침이 없다. 긴 이랑을 따라 콩을 심고 김을 매신다. 푸름이 점으로 살아나더니 줄 푸름이 되었다. 대단한 자연의 힘은 밭을 덮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고단한 대가에 자연이 도운 것이다. 할아버지 바탈 밭엔 풀이 수북하다. 개망초가 꽃을 피우고, 달맞이꽃이 가득한 비탈밭에 고라니가 찾아왔다. 처절한 울음으로 골짜기를 갈라놓는다. 임 찾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 비탈밭엔 설치미술가도 있다. 거대한 거미의 작품들이 산을 가득 덮었다.

거미들의 설치미술이 아름답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눈앞을 막아선다. 밤새 거미가 처 놓은 설치미술 작품이다. 갑자기 뒷걸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거미줄을 지운다. 정원의 꽃과 나무에도 하얀 거미줄이다. 거미줄에 하얀 이슬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떨어질 듯, 말듯함에 숨이 멎는다. 참, 기가 막히는 설치미술품이다. 거미와 자연이 어우러진 골짜기의 설치 예술이다. 앞산 소나무에도 이슬에 젖은 거미줄이 가득하다. 이슬이 내려온 곳에 햇살이 도착했다. 야, 저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오묘한 모양의 거미줄에 정신줄을 놓는다. 거대한 소나무에 그물망을 설치했다. 누구라도 걸리길 기다리며 숨어 있는 거미다. 거미는 먹고사는 처절한 일이지만, 이슬 먹은 미술품은 아름답다.


여러 산 식구들이 모여사는 골짜기가 살맛 나는 이유이다. 식구들의 삶은 다양하지만 질서가 있다. 여러 소리는 적당한 화음을 이루고, 자연의 작품들은 아기자기한 조화를 이뤄준다. 거대한 앞산이 점잖게 동네를 지켜주고, 그 위를 하얀 안개가 덮는다. 안락함을 안겨주는 아침이다. 이웃집 닭이 새벽을 깨워주면 산새들이 화답을 한다. 깜짝 놀란 꽃들이 피어주면서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넘어온다. 그 안에 자리한 앞산 녹음이 조화를 이뤄준다. 서로가 어울리며 이웃을 방해하지 않는 삶, 골짜기 삶이 살아갈만한 이유이다. 아침을 축복하듯 맑은 호박꽃이 배시시 웃고 있다. 산속 깊숙이 자리한 골짜기에서 많은 식구들이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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