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떠나면서, 꽃이 가득한 정원)
계절의 변화 속에 여름은 크나큰 심술을 불렸다. 곳곳에 물을 내리 쏟으며 골을 부렸다. 긴 골짜기마다 생채기를 냈고 밤새도록 으르렁거렸다. 언제나 조용하던 골짜기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고요하고도 조용한 골짜기를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창문을 열고 먼 하늘을 원망도 해 본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뉘이며 내일은 밝은 햇살을 기대해 보는 밤이다. 느닷없이 나는 소리, 가는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린다. 커다란 빗줄기가 아님에 안심하며 잠든 새벽, 왠지 몸을 나른하기만 하다. 간신히 눈을 뜨고 일어난 아침, 밝은 햇살이 산을 넘어왔다. 며칠 만에 만나는 햇살이던가? 진한 빗방울을 털어낸 앞산 녹음이 가볍게 몸을 흔드는 아침이다.
짓궂은 장마가 서서히 물러가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앞산의 녹음이 짙어지고 몸을 숨긴 새들도 재잘대기 시작했다. 봄부터 키워낸 새끼들은 어디다 숨겨 놓았을까? 매우 궁금한 아침이다. 장맛비를 잘 참아낸 새들이 잔디밭에 내려앉았다. 뭐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보다. 갖가지 먹거리를 찾으며 재잘거리며 총총걸음이다. 작은 꼬리를 앙증맞게 흔들며 걷는 참새, 오랜만에 보는 놀음이다. 긴 장마가 꼬리를 감추며 찾아온 풍경이다. 녹음에 내려앉은 작은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짐에 휴 하고 숨을 쉰다. 곳곳엔 장마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푸름이 좋아 심어 놓은 가을 상추와 배추, 장마는 봐주지 않았다. 곳곳에 상처를 냈고 잎은 시름시름 앓고 있다. 장맛비가 내리는 중에도 벌레는 쉼이 없었다. 곳곳에 구멍을 냈고 보기가 안타까운 푸름이다. 거센 비를 막아주려 비닐을 덮었다 벗기길 수차례 했다. 햇살을 주고 싶었고 거센 비를 막아주고 싶었다. 아침이면 제일 먼저 찾아가는 텃밭, 이내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어떻게 저리도 처절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앙상한 줄기가 바람에 떨고 있다. 장맛비가 서러웠고 벌레가 얄미웠다. 어떻게 해줘야 할까를 망설이는 아침, 뜬금없는 호박꽃이 배시시 웃고 있다. 장맛비에도 길게 줄기를 늘인 호박이다.
수차례 모종을 심으며 아끼던 가을을 기약하던 푸름이였다. 처절하도록 장마가 짓 밞은 가을 푸름을 정리해야겠다. 귀엽고도 앙증스러운 상추와 배추를 다시 심어야겠다. 가을날의 잔치를 위해 푸름을 복원해 가을을 맞이해야겠다. 지칠 대로 지친 푸름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다시 심어야겠다. 작은 텃밭에 오래 전의 평화를 찾아 주고 싶어서다. 심지가 굳은 케일은 아직 버티고 있다. 대견한 푸름이 작은 바람에 몸을 흔든다. 잎새에 얹혀있던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선선한 바람 따라 얹혀 온 뜰 앞 도랑물 소리는 최고의 선물이다.
골짜기의 평화를 지켜주는 믿음직한 파수꾼이다. 갖가지 서러움을 모두 싣고, 골짜기에 숨어 있던 삶의 흔적들이 모두 실려 떠나갔다. 장마에 드러난 흔적엔 어느새 새 식구가 자리했다. 커다란 새 바위가 자리를 잡았고, 제각각 모양의 자갈들이 바닥을 메웠다. 언제나 창문을 열면 장맛비 소리 같은 물소리다. 거센 비가 오는 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거센 도랑물 소리가 정신을 혼미하게 해서다. 정신줄을 잡고 보니 도랑의 옹알거림이다. 떠난 식구들을 그리는 새 식구들과의 옹알거림이다. 새 바위돌이 물길을 막았고 새로 온 자갈들의 반가운 고음이다. 높고 낮은음이 어우러진 골짜기의 소리였다. 골짜기에 평화를 찾아 준 환희의 소리다.
환희의 소리를 따라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어느 마을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얼마만인가? 절로 발걸음이 멎어지는 골짜기다. 야, 저렇게도 안개가 피어오르는구나! 가끔 만나보는 하얀 물안개가 다시 피어오르는 골짜기다. 도랑가에 피어난 메리골드도 고개를 들었다. 주황색 꽃을 피웠지만 시무룩했던 메리골드다. 긴 장마가 물러가자 기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찾아온 물안개에 몸을 흔든다. 낮게 흘러가는 맑은 도랑물 위에 안개가 피어나고, 수줍게 피어난 천수국이 활짝 웃고 있는 풍경이다. 골짜기 식구들의 어울리는 풍경이 골짜기의 평화스러움을 알려주는 아침이다.
도랑물 떼창을 따라 간 눈길은 앞산에서 멎었다. 녹음 따라 짙어지는 여름, 하얀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았다. 야, 저런 안개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니. 오래전 대관령을 넘으며 만났던 안개다. 산 허리를 휘감고 쉬어가는 안개다. 하얀 안개도 산 허리를 휘여 잡았다. 서로가 엉켜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침부터 주고받는다. 서서히 하얀 안개가 산을 넘을 즈음, 햇살이 그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얼마 만에 만나는 하얀빛이더냐! 모든 것인 한 곳으로 빨려 들었다. 밝게 산을 넘은 환희의 빛으로 모인 것이다. 자연의 신비함에 숨이 멎는 골짜기가 한없이 한가한 아침이다. 오로지 도랑물 소리에 재잘대는 새소리만 끼어들 뿐이다.
서서히 장마가 물러간 골짜기, 햇살이 넘어오면서 골짜기가 부산해진다. 산 말랭이 푸른 밭에 농부가 서성인다. 부스스 일어난 푸름이 잠을 털어내는 사이 밭이랑을 가득 덮은 푸름이 햇살에 빛이 난다. 동네도 부스스 잠을 깬다. 서서히 햇살이 짙어지며 동네가 속살을 드러냈고, 농부들의 발길이 바빠진다. 흩어진 논둑을 갈무리해야 하고, 무너진 밭둑을 돌봐야 한다. 한해의 피와 땀으로 이룬 논과 밭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산비탈에 줄 푸름이 점점 짙어지면서 언덕 밑 외딴집에 연기가 솟아난다. 눅눅해진 마음을 데워야 하고, 늦은 아침을 지어야 한다. 장마가 끝을 보이기 시작한 골짜기, 여름 매미 떼창을 따라 편안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