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인정하면 편하다(몽골, 게르에도 석양이)
코로나 19로 인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저녁을 먹게 되었다. 모두가 모임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 끝에 넉 달 만에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저녁 예약이 오후 일곱 시로 되어있지만, 어느 친구들은 여섯 시가 되면 홀연히 나타나 삼겹살을 구워 먹곤 한다. 오래전에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라 거리낌이 없어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당연히 손을 한번 잡아 봐야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주먹을 맞대는 것으로 대신하고 식탁에 죽 둘러앉아 소주 한 잔씩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한다.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삶을 살아가고 각각의 환경이 다르게 살아왔으니 밥을 먹는 광경도 다양해서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거세게 욕이 섞인 말을 하는 친구도 있고 이에 뒤질세라 맞받아치는 친구도 있어 시끄럽기도 하다. 친구들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친구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식당 안이 쩌렁쩌렁 울려 다른 손님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온 과정이 그러하고, 수 십 년을 같은 방법으로 살아왔다. 그것이 고쳐질 리가 없을 것인데도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멀쩡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내가 걱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기를 갖다 주면 다른 부분으로 또 바꾸어 달라고도 한다. 싱싱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일까? 웬만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듯이 그냥 먹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삼겹살엔 당연히 파절이가 주어지는데, 파채 위에 소스가 얹혀 나오면 소스를 섞어 먹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종업원을 불러 기어이 파채와 소스를 섞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방법 일 것이다. 종업원은 종업원대로 그런 손님도 있구나라는 생각, 나는 내가 섞어서 먹지만 그 친구는 그리 살았으니 섞어 달라며 사는구나라는 생각, 반대로 그 친구는 나를 보면서 저 친구는 지가 섞어 먹네라는 생각 말이다.
삼겹살이 주문되고 고기가 나오면, 고급 식당에서야 종업원이 구워주지만 서민들이 찾는 식당은 그렇지 않은 것이 보통일 게다. 그러니 고기가 나오면 누구든지 고기를 구워야 하는데, 언제나 고기를 집는 집게와 가위를 먼저 잡아야 마음이 편하다. 고기를 구어야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집개를 들고 고기를 굽는 것은 고기를 잘 굽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봉사정신이 있어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고기가 나왔으니 당연히 구워야 먹을 수 있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먼저, 불을 켜서 불판을 적당이 달군 후에 기름이 잘 빠지도록 고기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고기를 그렇게 놓으면 안 된다고 첫 번째 태클이 들어온다. 하는 수 없이 친구 말대로 고기를 옮겨놓고 고기를 구어야 마음이 편하다. 적당이 구워지면 반대로 뒤집어 놓고 굽는다. 그러면 고기를 뒤집어 놓는 시간이 또 문제가 된다. 어느 시간에 고기를 반대로 놓아야 좋은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한쪽이 적당이 익으면 반대로 뒤집어 놓고 고기를 익힌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고기를 익혀 먹기 좋을 만큼 고기를 썰어 놓는다. 이번에는 고기의 크기가 또 문제가 되고, 크기 싸움이 끝나면 어느 것이 익은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그러면 알아서 먹으라는 말만 하고 또 고기를 굽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옆에 있던 직원이 결혼 초기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신랑이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 써야 하는데 왜 중간부터 짜 쓰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그리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매일 잔소리를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소연이다. 그러면 치약을 두 개 놓고 쓰면 되지 안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보기 싫다는 말을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같은 집에서 같은 화장실을 쓰면서 매일 봐줘야 하니 말이다.
세월이 많이도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대가족 시대에는 모두가 모여 살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참으며 살아왔다. 모두가 대부분 같은 환경에서 같은 방식으로의 삶이 익숙했었다. 하지만 핵가족이 시대가 되고, 더구나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도 허다하게 많아졌다. 고기 하나 구워 먹는 방법부터, 치약을 쓰는 방법까지도 각기 다르다. 혼자 살면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그 사람만이 편안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방법을 고쳐서 내 방법으로의 정착은 할 수가 없는 요원한 일이 되었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 되었다. 서로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양하고도 복잡한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어느 방식이, 어느 사고가 모두에게 편리하리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사는 방식을 인정해 주면서, 서로가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리라. 식당에 친구와 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 방법도 제 각각이다. 그러니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떡하겠는가?
모두가 그런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도 지나 부모는 자식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살면 되고, 자식은 그대로의 방법으로 부모에게 불편하지 않게 살면 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에도 살아가는 최소한의 도덕과 예의가 있고, 가족도 지켜져야 하는 문화와 예의가 있다.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와 예의를 잊지 않고 사는 방법도 복잡한 현대사회를 잘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