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3월이 가고 있다, 스리랑카 캔디호수)
자그마한 시골동네, 어린것들이 초등학교를 오가기는 너무 먼 거리였다. '오리'라고 하는 등하굣길, 어린 철부지들에게는 험한 길이기도 했다. 세찬 비가 내리기도 했고 바람도 불었으며, 겨울이면 눈이 앞을 가로막았다. 코찔찔이 조무래기들이 한데 어울려 등굣길에 나섰다. 자갈길에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엔 많은 차량들이 오고 갔다. 학교를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늘 망설이기도 했다. 가끔 중도에서 놀다 되돌아오기도 한 초등학교 길, 그예 발각되어 선생님께 종아리를 맞아야 했고 또 부모님의 꾸지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까?
학교 근처엘 가보지도 못했던 부모님, 자식만은 가난을 면하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시킬 수 있을까? 큰 아들이지만 새어머니아래서 자란 아버지는 늘 천덕꾸러기였다. 삼촌들은 어엿한 대학을 졸업했지만 어림도 없는 큰아들이었다. 농사일에 피땀을 흘려야 했고, 당신의 아버지 일에 열중이셔야 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늘 불평이셨고, 중학교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삼촌과 조카를 늘 부러워하셨다. 아들이 선생님이 되는 것을 그렇게 원하신 이유다. 아들도 선생님을 만들어야만 했기에, 초등학교 입학의 고단한 발길은 문제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3월, 낯선 3월 뒤에는 늘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검정 고무신의 고단한 초등학교, 무엇을 배우겠다고 다녔을까? 어른들이 가라 했으니 가는 학교였고, 끝났으니 돌아오는 일과에 불과했다. 부모님의 간절한 심정을 알리 없는 철부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부를 잘 해냈다는 것이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공부를 했고, 웬만해선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지 않았다. 가난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고단한 학교길을 이겨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중학교를 진학해야 하는 시기, 선택의 길은 없었다.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고단함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철부지의 소망은 부모님이 기대와 달랐으나 우선은 중학교 진학을 해야 했다.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부모님의 희망을 안고 가는 중학교였다. 어머님의 뜻에 따라 근처 중학교가 아닌 대처에 있는 중학교를 선택했다. 부모님, 그중에도 어머님의 선택이었다. 낯설고도 먼 곳에 있는 학교를 어떻게 갈까?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아들은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낯설고 불안했던 중학교 입학에도 대장부 같았던 내 어머님이 계셨다. 고지식하게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시는 어머니셨다.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 입학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철부지, 낯선 환경에 불안한 시험이었다. 어떻게 낯선 시험과 분위기를 이겨내야 할까?
교문밖에는 늘 기다려주시는 어머님이 계셨다. 초등학교 운동장이 세상에서 제일 큰 마당이라 생각하던 아들이 대처에 나와 입학시험을 보고 있다. 어머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시골뜨기 아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치렀다. 아는 친구 한 명 없는 교실에서 입도 떼지 못하고 시험을 치렀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는 경사를 맞이했다. 어머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중학교 입학이었다. 학교 부근의 외갓집과 하숙집에서 오가기도 하고, 먼 거리에서 통학하며 공부를 했다. 부모님 생각에 처절하게 공부를 했고, 부모님은 늘 좋아하셨다. 성적표를 들고 부모님께 보여드리려 밭으로 뛰어갔다. 흐뭇해하시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다. 부모님의 피땀으로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할까?
선택지가 없는 실업계 고등학교였다. 돈을 벌어 부모님의 짓눌린 어깨를 들어 드려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허락지 않으셨고 그예 인문고등학교 진학을 권하셨다. 명문고등학교 진학수를 늘려야 하는 선생님, 선생님을 만들어야 하는 부모님의 은연중 합의가 이루어낸 진학이었다.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보다 큰 도시로의 진출이었다. 몇 명의 중학교 친구들과 동행한 입학이었지만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시험을 봐야 했고, 입학을 해야 했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어김없이 어머님의 기다림이 있었다. 교문 밖에서 기다리셨고, 농사일을 하시면서 기다리셨다. 어머님과 함께 한 낯선 3월의 행사였고,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을 하자 대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 명문대로의 진학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가슴속 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은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부모님의 원을 풀어드리고자 마음을 굳혔다. 지방 사범대학을 일 년만 다니고 재수를 하자는 생각.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고, 낯선 곳에서 하숙을 해야 했다. 교문 밖에는 어김없이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3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어머님의 끊임없는 기도가 들려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3월의 입학식에는 어머님이 계셨다. 사법대학의 합격으로 부모님의 원을 풀어드렸으니, 이젠 나만의 길을 가고 싶었다. 서울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욕망을 떨쳐낼 수도 없었지만 가정형편에 사범대학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다시 고민은 시작되었다.
대학공부와 재수를 위한 대학입시 준비, 두 가지 공부를 다짐한 대학생활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 야간 학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야간수업을 해 보고 싶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떠 오른 것이다. 심훈의 상록수를 떠오르게 하는 학교, 남포불이 등장하고 등잔불이 있는 시골학교였다. 전깃불도 없는 초등학교에서 야학을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가르침이었다. 대학공부와 재수준비에 지친 몸, 아이들을 가르치며 마음을 다스렸다. 서울로의 진학은 물 건너갔고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세월을 보냈다. 겨울이면 아이들을 모아야 했고, 3월이면 입학식을 치러야 했다.
입학식에 어머님의 그림자도 없는 아이들, 교문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님이 생각났다. 아이들을 위해 그 일을 내가 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검정고시에 합격시켜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대학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을 심어 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일을 대학 4년 내내 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한 대학시절이었다. 어려운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정신을 쏟았던 대학 4년을 졸업하는 날, 거기에도 어머님이 계셨다. 든든한 디딤돌이 되셨던 나의 어머님,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 된 것은 어머님의 피나는 공부였다. 아들의 3월을 든든하게 지켜주시던 어머님은 내 곁을 떠났지만, 나의 낯선 3월의 시작 뒤엔 늘 어머님과 함께였다. 어머님과 함께했던 3월이 벌써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