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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an 22. 2024

내 아버지 마음 싣고 딸네 집으로 달려간다.

(내 아버지 세월이 되었다.)

아침나절, 부산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다. 매일 전화로 안녕을 묻는 살가운 딸이다. 손녀가 전화를 하고, 엄마도 전화를 하면서 하루의 삶을 주고받는 아이들이다.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아빠, 쌀 있어요? 쌀이 떨어져 가는데, 쌀 좀 줄 수 있느냐는 전화다. 시골에서 농사지은 쌀을 줄 수 있느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가을이면 자식들에게 햅쌀을 주고, 다 먹으면 또 주곤 한다. 줄 수 있는 쌀이 있고, 아이들이 있으니 늘 뿌듯한 삶이다. 떨어질 때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알았어 이번주에 내려가려 했으니 가져간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내 아버지 생각이다. 고단한 농사 일로 가족을 건사하셨던 그리움 속 아버지다.


자그마한 다락논엔 자갈이 가득하고, 졸졸거리는 도랑물만이 생명수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논으로의 역할을 그만두어야 하는 논,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재산이었다. 간신히 소의 발걸음만 할 수 있는 골짜기의 논은 내 아버지 피 같은 땀으로 일구어낸 논이었다. 하늘의 은혜를 받아야 모를 심을 수 있고, 가뭄이 들면 호미로 모를 심는 이른바 '호미모'를 해야 하는 다락논이다. 고단함으로 모를 심고 여름비를 견뎌내야 가을날의 추수를 할 수 있었다. 가을을 맞이해도 고단한 농사일은 풍족함을 주진 못했다. 보리쌀에 귀한 쌀 한 움큼씩만 섞어야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만은 벗어나고자 긴 세월을 이겨내야만 했다.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하던 중에도 늘 쌀을 보내 주셨다. 정성으로 농사를 짓고, 햇볕에 적당히 말려 찌은 아버지표 쌀은 언제나 윤기가 흘렀다. 언제나 달큼한 맛이 있는 밥이었다. 어디서 이런 쌀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하숙비를 쌀로 원했던 학창 시절, 아버지는 마다하지 않으셨다. 농사를 지으시고 방아를 찌어 늘 쌀을 전해 주셨다. 한 달에 다섯 말이라는 하숙비는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이었다. 무거운 쌀을 손수 버스에 실어 날라 주셨다. 아버지이기에 해 주신다는 무심했던 철부지, 이젠 내 아버지가 하던 일을 내가 하고 있다. 내 아버지 피땀으로 일군 논에서 지은 쌀을 내 자식에게 보내주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하던 시절, 쌀을 사서 먹었으면 했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연히 당신이 지은 쌀을 보내주셨다. 가끔은 먼 거리를 손수 짊어지고 오시기도 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 후 택배라는 것이 생기자 손수 포장하여 보내주셨다. 집까지 배달해 주지 않던 시절이기에 손수 찾아가야만 했다. 택시의 힘을 빌려 보려 하지만 택시기사는 늘 짜증을 냈다. 늘 사서 먹으면 될 것을 쓸데없는 고생을 한다는 마음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사서 먹으리라는 생각이었지만 아버지는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연히 당신이 지은 쌀로 밥을 지어먹어야 했다. 갑자기 집안이 조용하다. 오고 가던 아내가 외출 한 모양이다.


한참 후에 나타난 아내, 두 손에 물건이 가득이다. 무엇을 그렇게도 많이 사가지고 왔을까? 내일 부산 딸네 집에 가려고 이것저것 챙기러 갔던 모양이다. 딸이 좋아하는 반찬과 손녀의 먹거리를 해 주려는 심산이다. 손녀가 좋아하는 우엉과 검은콩 그리고 돼지고기도 사 왔다. 갖가지 반찬거리를 한 상자 들고 왔다. 부산엔 고기가 없느냐는 말에 생선이 풍족하니 육고기가 먹고 싶을 것이란다. 오전 내내 풍겨온 음식냄새, 무엇을 그렇게도 많이 준비하였을까? 냉장고를 털어내 각족 음식을 만들었다. 지난주에 수원 아들에게 해 보냈으니 딸도 해주어야 한단다. 부산으로 향하는 준비는 오랫동안 더 계속되었다. 부모의 마음이 가득 실린 반찬이다. 


손수 지은 쌀은 아니지만 각종 반찬과 함께 딸 집에 가려니 감회가 새롭다. 쌀이 있어 달라는 아이가 있고, 거기엔 밥과 나물을 좋아하는 손녀가 있다. 창고에 확인해 보니 충분한 쌀이 있다. 쌀과 반찬을 싣고 내려가려는 것이 고마운 것은 왜일까? 그렇게도 힘겨운 쌀을 짊어지고 오셨던 내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셨을까? 나보다도 훨씬 고단하셨을 아버지가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었다. 당신도 힘에 겹고 쌀을 받아가는 사람도 힘들어서였다. 아버지 세월이 되어 쌀을 달라하니 어렵다는 생각보단 고맙다는 생각이다. 왜 그럴까? 세월은 공평하게 흐른다 했으니, 쌀을 몇 번이나 더 줄 수 있을까? 기쁜 마음이 드는 이유일 것이리라.


그렇다. 힘겨움보다는 주는 즐거움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야 배추 한 포기를 주려 하셨고, 기름 한 병을 찔러 주신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빛바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하나라도 더 주려하셨다. 얼기설기 끈으로 엮은 허름한 상자, 어쩐지 불편하게 보이는 상자였다. 상자가 찢어지도록 욱여넣고 단단히 묶으셨다. 고춧가루가 들어있고 참깨 봉지가 자리 잡았다. 상자에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무엇이라도 채워 넣어야 했다. 퉁명스럽게 그만 두라 해도 전혀 상관없으셨다. 기어이 간장 한 병을 찔러 넣어야 마음이 편하셨던 당신들, 굽이굽이 산모퉁이를 돌아가기까지 까치발로 서 계셨다. 당신들 세월이 되고서야 깨달은 아둔한 자식, 아이의 전화 한 통화에 한참을 서성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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