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아침 생각, 여름을 재촉하는 기린초)
조용한 골짜기에 여름 뻐꾸기가 하늘을 가른다. 매칼없이 우는 듯한 여름 뻐꾸기, 오래 전의 기억을 주고 뒷산을 넘었다. 자그마한 초가집은 텅 비어 있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셨고, 아버지는 들에서 일을 하실 게다. 먼지가 뿌옇게 나는 신작로를 터덜거리며 학교를 다녀왔다. 멀쩡한 길을 두고 산길을 돌아온 길, 배는 등가죽에 붙었지만 집안은 텅 비어있다. 노란 병아리를 몰고 암탉이 안 마당을 오고 간다. 어린 새끼들을 돌보느라 연신 두리번거리는 암탉, 마치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고단한 몸짓이 담긴 황톳빛 뜰팡, 황토를 물에 이겨 바랐다. 어머니의 손가락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설픈 뜰팡 위엔 무심한 절구통이 놓여있다. 아버지가 힘들여 깎아 만든 절구, 보리를 찧고 밀을 빻아 식구들 입에 풀칠을 해 주는 보물이다. 봄이면 쑥개떡을 했고, 가을이면 인절미를 했던 절구통 옆엔 헝겊으로 기운 키가 걸려있다. 어머니가 여러 곡식을 까부르던 소중한 친구다. 비스듬히 박힌 못에 가까스로 걸려 햇살을 맞고 있다. 따가운 햇살이 내려쬐는 조용한 초가집이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늦봄, 지천으로 피어있던 진달래는 모습을 감추었다. 벌써 하얀 찔레꽃이 덤불을 덮었으니 찔레순도 쇠어졌다. 껍질을 벗겨 먹으면 달큼한 찔레 순, 학교길에 한 움큼 꺾어온 찔레순이 책보따리 옆에 놓여있다. 진달래 꽃을 따 먹고 나면 찔레순이 나왔다. 다시 하얀 아카시 꽃이 피면 신나는 학교길이다. 학교길에 늘, 먹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뿌옇게 먼지가 앉은 마루에 늦봄이 지나간다. 어김없이 노란 송홧가루가 마루를 차지했고, 떠듬떠듬 난 연초록 감잎이 하늘을 덮고 있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기척이 없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삐꺽 대는 부엌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컴컴할 뿐, 먹을 것이 없다. 어떻게 할까? 나무로 된 비스듬히 누운 찬장을 열자 찬밥덩이가 보인다. 대부분 시커먼 보리쌀이고, 몇개의 하얀 쌀알이 얼굴을 내밀었다. 찬밥 덩이를 누런 양재기에 쏟았지만 밥을 말아먹을 물이 없다. 부엌문을 열자 삐그덕하며 봄을 깨워 놓고 만다. 마당 끝 펌프에 마중 물을 넣고 손잡이를 두어 번 누르자 물이 쏟아진다. 찬밥 양재기에 물을 받아 툇마루에 앉았다. 반찬이라곤 찬장 구석에서 찾은 빨간 고추장뿐이다. 얼른 일어나 뒤뜰로 나섰다.
허름한 울타리를 넘어 선 텃밭,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먹거리가 있다. 고추가 자리했고 수줍은 오이가 달렸으며, 옆으론 마늘이 자라고 있다. 소박한 오이 한 개와 고추 몇 개 그리고 달큼함과 매콤함이 섞인 마늘종을 뽑아냈다. 얼른 울을 넘어 허기를 메워야 해서다. 누런 양재기에 찬밥이 물에 섞여 있다. 얼른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이를 고추장에 찍는다. 한입 베어 물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점심상이다. 고추를 쿡 찍어 먹기도 하고, 마늘종을 찍어먹고 찔레순도 찍어 먹는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성찬에 눈물이 난다. 철부지가 엄마를 기다리며 점심을 먹고 있다. 뜬금없는 여름 뻐꾸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초록 잎을 어설프게 단 감나무 그늘이 마당에 걸쳐있다. 뒤뜰 언덕에 핀 하얀 수국이 바람에 일렁이고, 한가한 마당에 잠자리가 찾아왔다. 하늘을 날던 잠자리가 심심해 하늘을 한없이 빙글거리며 돌고 도는 봄날, 참새 한 마리가 처마밑을 오고 간다. 처마밑에 집을 지은 참새, 봄내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했다. 온종일 먹이를 물어 나르며 새끼를 키워냈다. 무단으로 세 들어 사는 참새는 한 식구나 만찬가지다. 뒤뚱거리는 암탉이 새끼를 돌보는 마당, 여기엔 참새도 다를 것이 없다. 모든 어미는 할 일이 같은 가 보다. 암탉이 그렇고 참새가 그러하며,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밭에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언제 오려나 내다봐도 기척이 없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철부지를 어머니가 모를 리 없다. 허기진 철부지 밥을 줘야 하는데 비가 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해서다. 옥수수 마저 심어야 하고 감자둑을 돋워 줘야 했다. 굵직한 감자를 캐야 하고, 알이 실한 옥수수가 열려야 해서다. 조금만 더 한다는 것이 점심마저 걸러야 했다. 굽은 등 펴며 하늘을 보고, 긴 밭고랑에 몸은 고단하지만 조금 남은 햇살마저 넘기고 오려나 보다. 조용한 시골마당에 감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봄날, 오늘도 무심한 여름 뻐꾸기는 골짜기를 가르며 계절을 재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