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우는 날, 붉은 병꽃)
여름으로 치닫는 골짜기에 산꿩이 정적을 깨우는 오후다. 가끔 울어주는 여름뻐꾸기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산꿩이 숲 속으로 숨어들면, 멀리서 님을 찾는 고라니가 골짜기를 가른다. 여기가 골짜기임을 알려주는 동물들이 가득한가 하면 제자리 묵묵히 지키며 여름을 빛내주는 꽃들도 있다. 봄꽃이 자취를 감추고 잠시 쉼이 있는가 했는데, 조용한 골짜기가 시끄러워지는 초여름이다. 꽃들의 아름다움이 앞을 다투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꽃을 피우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꽃은 의젓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붉은 병꽃이다. 붉음도 진분홍빛에 가까워 눈길을 한 번에 휘어잡는다. 하얗게 꽃을 피워 봄을 알려주던 병꽃나무가 우두커니 봄을 지키는 사이, 붉은 병꽃이 꽃을 달았다. 붉게 물든 나팔모양의 꽃이 숨이 넘어갈 듯 아름답다. 얼마나 많은 꽃을 피웠는지 가지가 축 늘어져 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꽃이기도 한 붉은 병꽃이다. 신비한 자연의 빛깔에 눈이 멎어 있을 때 여름뻐꾸기는 아직도 긴 울음을 울어대는 골짜기다.
붉은 병꽃나무 밑으로는 말발도리가 자잘하게 꽃을 피웠다. 하얀색으로 무장한 꽃, 수없이 많은 꽃들이 어울려 앙증스럽다. 발말도리, 꽃이 지고 맺는 열매가 발굽에 박는 편자를 닮았다고 하여 말발도리라 하는 꽃이다. 누가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저마다의 특징을 살려 붙여줌에 가끔은 깜짝 놀라기도 한다. 자잘한 말발도리는 바위틈에 자리를 잡고 겨울을 지냈다. 살아 있으려나 걱정하며 안타까웠던 겨울을 지내고 작은 싹을 틔워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말발도리는 알고 있을까? 작지만 하얀 꽃이 처절할 정도로 맑은 하양이었다. 벌써 꽃을 지운 만첩빈도리와 비슷하면서도 색깔이 다른 말발도리다.
말발도리가 꽃을 피우는 사이, 노란 기린초가 화단을 메웠다. 연초록에 노랑이 섞인 기린초가 잘 어울리는 화단이다. 화단을 가득 메운 기린초는 어찌 보면 돌나물꽃과도 비슷하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 동물 기린의 뿔과 열매모양이 닮아 기린초라 한다는 꽃이다. 기린초는 가끔 자전거길에도 만나는 꽃이다. 잔잔한 언덕 바위틈에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노란 꽃 속엔 여름내 뒤뜰을 덮고 있던 돌나물도 있다. 물만 주면 맑은 푸름을 주던 돌나물이 노란 꽃을 피운 것이다.
연한 노랑빛으로 꽃을 피운 돌나물도 맑기는 같다. 빈터에 뿌리만 던져 놓아도 살아나는 돌나물은 봄철에 입맛을 돋워주는 귀한 나물이었다. 얼마나 번식력이 강한지 뜯어먹다 지쳐 놔두고 말았다. 상큼한 식감에 수분이 가득한 돌나물은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잔잔함은 기린초에 뒤지 않는 돌나물이 노란 꽃으로 피어나면, 노랑의 쌍벽에 황금 조팝나무도 있다. 맑은 노랑 잎에 밝은 햇살이 찾아오면 진한 노랑빛을 발하는 황금조팝나무다. 다복하게 자리를 잡고 노랑을 자랑하는 꽃들이 가득해졌다. 노랑으론 황금낮 달맞이꽃도 있다.
지난해 봄, 이웃들이 모여 동네길에 황금달맞이꽃을 심었다. 씩씩하게 자라 골짜기를 환하기 비추며 한 해를 보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을 생각하지만, 곳곳에 황금낮달맞이 꽃이 한창이다. 자주색 달맞이꽃이 있는가 하면 황금빛 달맞이꽃이다. 진한 노랑빛으로 동네를 환하게 비추며 골짜기를 밝게 빛내주고 있다. 밤에 핀다는 달맞이꽃이 껑충한 키를 자랑한다면 황금달맞이꽃은 작은 키에 큰 꽃을 달고 있다. 한 여름의 꽃, 꽃범의 꼬리는 아직도 준비 중이지만, 보랏빛으로 뜨락을 빛내주는 꽃도 있다.
자잘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등심붓꽃, 마치 먹물을 찍은 붓과 같다 하는 등심붓꽃이다.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냘픈 꽃을 피우고 있다. 번식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잔잔한 보랏빛을 과시하고, 꺽다리 밥티시아의 보랏빛 꽃도 한창이다. 껑충한 키에 맑은 보랏빛을 달고 있는 밥티시아는 거만하지만 고귀하다. 나쁘지 않은 도도한 품위가 느껴지는 밥티시아다. 여기에 여름에 빛나는 금계국도 꽃잎을 열었다.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는 금계국이 꽃을 피웠지만, 아직도 기다리는 꽃들이 많다.
꽃범의 꼬리가 기회를 엿보고 있고, 나리가 꽃피울 준비가 한창이다. 바위를 가득 덮고 있는 바위취가 기다리고 있고, 다시 뜰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절초가 있다. 봄비 속에 파란 잔디밭을 가지런히 가다듬었다. 가뭄으로 더디게 자란 잔디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었다. 내리는 비에 젖어들면 단정하지 못할까 염려에서다. 꽃으로 차려진 나의 뜨락에 더 진한 여름이 찾아오면, 꽃범의 꼬리가 꽃을 피우고 나리와 도라지 그리고 텃밭 방울토마토도 열릴 것이다. 붉음과 노랑에 검은색을 가진 방울토마토가 익어가고, 뜰보리수가 빨간 열매를 달고 여름을 알려 줄 것이다. 곳곳에 자연의 색깔이 빛나는 계절, 골짜기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