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도랑물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도랑에 대한 기억)

by 바람마냥

골짜기에 집 앞엔 작은 도랑이 있다. 몇 해전, 골짜기로 숨어들면서 첫 번째 눈에 띈 것은 작은 도랑이었다. 시원함과 그리움을 주는 도랑, 그 안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고단함을 주는 도랑이기도 했다.


초가집을 돌아 뒷산으로 가는 길목엔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오랜 가뭄에도 끄떡없이 물을 쏟아내주는 옹달샘이다. 가느다란 모래를 끝없이 밀어내는 맑은 물, 가끔은 산골가재가 어슬렁거렸다. 더러는 작은 새우가 풀 속으로 숨어들고, 언저리엔 붉은 꽃을 피운 고마니풀이 수북했다. 도랑물을 넘어선 물줄기는 작은 도랑으로 이어졌고 갖가지 사연들을 안고 있었다.

아침 앞산에서 만난 풍경

봄철이면 고마니풀이 수북했지만 수풀 밑으론 자잘한 자갈들의 차지였다. 돌멩이를 살짝 들어내면 알을 품은 가재가 움찔했고, 새끼 올챙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도랑은 굽이굽이 흘러 동네 개울로 이어지며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장마철이면 붕어가 헤엄을 쳤고, 미꾸라지가 꼬리를 흔들었다. 줄줄이 모여드는 송사리 떼의 놀이터였고, 끝내는 논자락으로 흘러들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여름 장마철, 심술 떠는 소나기가 동네를 덮쳤다. 넘치는 물을 감당하지 못한 도랑은 무너졌고,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사람의 숨결이 숨어든 논을 흩트려 놓았으며, 땀이 숨어있는 비탈밭을 절단 냈다. 사시사철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도랑은 모든 것을 드러내며 나자빠졌다. 기어이 사람들의 손을 빌려 제 모습을 갖추었고, 다시 일 년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갖가지 사연을 안은 도랑을 골짜기에서 만난 것이다.

여전히 흐르는 도랑물

바지를 걷고 도랑으로 들어섰다. 시원함이 온몸으로 전해짐이 추억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잘한 자갈이 간질이는 발바닥은 푸근했고, 널찍한 바위돌은 편안하기만 했다. 어디서 이런 물이 흘러 올까? 궁금해서 따라 오른 산자락엔 작은 도랑만이 보였다. 물의 발자국을 깊은 숲 속에서 만나게 됨은 마음마저 숙연해졌다. 말없는 숲이 이런 삶을 인간에게 주는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도랑이 주는 아픔은 너무나 컸다.


봄이면 겨울을 녹여주며 계절을 암시했고, 여름이면 굵어진 목소리로 골짜기를 호령했다. 가을엔 성숙해진 목소리로 계절을 노래하고, 겨울이면 침묵으로 골짜기를 맞이했었다. 어느 해부턴가 도랑의 깊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릎에서 장딴지로, 장딴지에서 발목만 잠기는 도랑물의 쇠잔함이었다. 서서히 쇠약해진 도랑물이 안타깝지만 아직도 끊임이 없는 물줄기에 감사해한다. 늦는 봄비가 한 줄금 골짜기를 적시었다.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봄비는 골짜기를 흠씬 적셔 놓았다. 도랑물이 살이 찐 아침이다.

밥티시아가 아침을 알려준다.

가느다란 도랑물에 살을 찌워준 봄비, 아침 햇살에 도랑물은 빛나고 있다. 도랑가에 줄지어 피어있는 황금낮 달맞이꽃이 맑은 빛을 발한다. 앞 산에는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먼 산에선 여지없이 여름뻐꾸기가 울어준다. 얼른 바지를 걷고 도랑으로 들어섰다. 발끝에서 전해오는 시원함에 온몸으로 전해온다. 오래 전의 시원함이 되살아 나는 아침이다. 먼 산 뻐꾸기 울음소리에 화답하는 산꿩이다. 푸드덕 숲 속으로 숨어드는 꿩 한 마리, 덩달아 산까치가 하늘을 가른다. 전깃줄에 산새들이 수다를 떠는 아침,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을까?


인적이 드문 산골, 골짜기 식구들이 이웃을 대신해 준다. 자그마한 도랑이 옹알거리고, 밝은 황금낮달맞이 꽃이 어우러진다. 햇살이 찾아오며 달맞이 꽃은 굳게 접었던 꽃잎을 열었다. 찬란한 이슬이 내려앉은 꽃잎이 머뭇거리는 사이, 산 넘은 산들바람이 간질여준다. 어떻게 할까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아침, 찬란한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골짜기다. 여기에 온갖 산새들이 참견을 하며 조용한 골짜기가 되살아난다. 여전히 도랑물이 말을 거는 아침, 골짜기엔 뿌연 물안개가 풍성한 수채화를 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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