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장맛비를 맞이하는 아침

(장맛비가 오는 날)

by 바람마냥

지난밤 내내 장맛비가 쏟아졌다. 후드득 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는 그리움을 지나 조금은 두려움이 배어 있다. 산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렇다. 혹시나 빗줄기가 거세지며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늘, 장마철이 면 불안해하는 이유다. 아침 창문을 열자 맑게 개인 하늘이 반갑기만 하다. 산을 넘은 햇살에 초록이 다가오는 아침은 골짜기의 삶을 편안하게 해 준다. 얼른 일어나 뜰로 나서 이곳저곳을 살펴봐야 한다.


집 앞을 흐르는 도랑이 아직도 평온하니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살이 거세지고 소리도 우람할 줄 알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다. 텃밭에 있는 토마토와 오이줄기가 끄떡없음에 안심이다. 뒤에 있는 텃밭 상추도 싱싱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음이 다행이다. 집안이 두루두루 평안하니 장마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안심이 되는 아침이다. 동네 이웃이 무엇을 하려는지 오가고 있다. 역시, 장맛비에 무사한지 점검을 하러 나서는 모양이다. 장맛비가 오는 날은 두려움보다는 그리움이 앞서 있었다.

IMG_5120[1].JPG 여름이 내린 호수(수채화)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리움 속에 두려움이 섞이게 됨은 왜일까?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걱정이 되어 그럴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은 늘 그리움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립고 대청마루에서 주무시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 머리엔 늘 흰 수건이 얹혀있었다. 무심한 세월은 머리칼을 앗아갔고 고단함을 이기지 못해 코를 고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리웠고, 다시 한번 눕고 싶은 툇마루였다. 먹고살기 힘겨웠던 시절의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했다. 비 오는 여름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락논을 놀리기 아쉬워 초봄에 감자를 심었다. 모를 심을 즈음에 감자를 캐고 모를 심는 이모작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감자를 캐고, 아버지는 모를 심기 위해 논을 갈아야 했다. 작은 바가지를 들고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기억이다. 어머님이 캐고 남은 감자 한 톨이라도 논을 가는 아버지의 쟁기 뒤에 나오길 기대하면 서다. 기어이 감자하나가 튀어나오면 그렇게 반가워하던 어린아이였다. 어머니가 좋아하시고 아버지가 대견하심에 힘든 줄도 모르는 하루였다. 감자 한 톨이 아쉬웠던 소중한 하루하루는 흘러갔고 삶도 다양해졌다.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IMG_2234.JPG 장맛비가 주는 선물(집 앞의 도랑)

처남이 감자 농사를 짓는데 감자를 캔단다. 감자를 캐고 나면 좋은 것만 골라 팔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니 필요하면 주워가란다. 망설임도 없이 아내와 함께 감자밭으로 향했다. 감자밭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대한 트랙터가 지나며 감자를 캐 놓으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좋은 감자만 줍고 나머지는 버린다. 곳곳에 나뒹굴어진 실한 감자를 모아 팔아도 되지만 인력이 없어 할 수 없단다. 저렇게 싱싱한 감자를 버린단 말인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열심히 주워 모았다. 차에 가득 실어다 친지들에게 나누어 준 기억이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세월이 변하고 말았다.


장맛비를 맞으며 모를 심던 부모님, 우산과 우비가 있을 리 없다. 볏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모를 심으셨다. 한 포기라도 더 심으려는 부모님, 한치의 빈 땅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속에도 손놀림은 그침이 없었다.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내리는 비에도 전혀 상관없는 부모님이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도 기어이 모를 다 심어야 돌아오셨다. 다락논이 끝났어도 일은 그침이 없었다. 열무밭을 돌봐야 하고, 쓰러진 옥수수를 세워야 했다. 비어 있는 텃밭을 그냥 볼 수 없어서다.

IMG_2402.JPG 여전히 장마철(앞산의 풍경)

모를 심는 계절이 돌아왔지만 비어 있는 논자락이 하루 만에 가득해졌다. 거대한 이름 모를 기계가 지나가고 나면 푸름이 심어 진 들녘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월로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자전거를 타고나서는 들녘은 언제나 분주하지만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지나는 길에 인사를 해도 건성으로 나누는 인사가 되었고,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 들판이다. 지나는 길 손을 그냥 두지 않았었다. 기어이 앉게 하여 점심 한상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한 이웃이었다. 조용히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햇살이 찾아온 아침이다.


오래 전과 다름없는 장맛비가 내린 아침이다. 그리움이 섞여야 할 장맛비가 전혀 다름으로 다가오는 아침이다. 어머님이 그립고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장맛비였다.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비는 그리움과 추억의 비였는데, 세월 따라 비의 모양도 소리도 달라졌다. 삶이 변하고 생각이 변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가슴까지 변한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렵기도 하다. 언제까지 그리움 속의 비가 되려나? 아직은 가슴 깊은 곳에 장맛비가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으면 하는 아침이다. 여전히 장맛비가 점잖게 왔으면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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