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건네주는 상과 상처)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언어 없이 살 수는 없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몸으로라도 전해야 함께 어울리며 살 수 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언어라고 볼 수도 있으니 우리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떻게 말을 하며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늘 고민스럽지만 말로 주는 상처는 칼로 베인 상처를 뛰어넘는다. 상대방이 있기에 말은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연말 송년회 모임이 수없이 많다. 덕담이나 주고받으면 좋으련만 이웃과의 어울림은 늘 방향이 없다. 피곤한 연말, 가능하면 필요한 곳에만 참석하며 몸과 시간을 아끼고 있다. 여기에도 끼고 저기에도 참석하려면 몸과 마음까지 피곤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여 송년회를 하는 자리,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삼겹살집에 둘러앉았다. 상차림이 만들어지고 많은 친구들이 속속들이 참여한 조촐한 자리다. 언제나 삼겹살 집에선 고기 굽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
먹기 좋게 굽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가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기는 지루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굽는 사이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눈으로 고기판을 노리고 있다. 고기를 굽는 것엔 관심이 없고 어느 것이 익었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마치 독수리가 먹을 것을 노리고 있는 형상, 먹이를 찍기 위한 집요한 눈빛이다. 기어이 노릇노릇한 먹잇감이 있으면 느닷없이 내려 쏘는 독수리부리처럼 젓가락으로 고기를 낚아챈다. 맛있다는 말은 없어도 일언반구의 말없이 먹기만 하니 그래도 고마운 친구다. 본인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는 친구도 있다.
고기를 위로 놓고 김치는 아래로 놓아야 한다느니, 삼겹살은 한 번만 뒤집어야 한다느니 끝없는 잔소리다. '그러면 네가 하든지!' 말할까 망설이다 꾹 참는다. 모두의 앞에는 파채가 놓여 있고, 위에는 소스가 뿌려져 있다. 젓가락으로 뒤적이면 먹을 수 있는 파채다. 옆에 앉은 친구가 얼른 종업원을 부른다. 무엇을 시키려나 생각하는 사이, 파채를 소스와 섞어 달라한다. 언제나 누리는 자리에만 있었던 사람, 갑자기 열이 나서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또 꾹 참아 낸다. 송년회를 핑계 삼아 친구를 만나러 서울 가는 버스 안이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한 시간을 속삭인다. 뒷 좌석에 앉은 두 아줌마의 속삭임이다. 오랜만에 오른 버스 안이 고요한 것은 휴대폰을 보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는 속삭임은 한 시간이 넘었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 더 참기로 했다. 어디선가 울린 '까똑!' 소리에 잠시 멈춘 속삭임은 버스가 정차하고서야 끝이 났다. 언제나 주고받아야 하는 말, 왜 이리도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그렇게도 많을까?
여의도 문법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어떻게 보복 운전을 할 수 있느냐는 하소연을 들어야 한다. 세상사 모든 일에 끼어드는 말의 홍수는 넌덜머리 나는 정치쇼를 아예 외면하게 했다. 내가 낸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잘 못 선택했다고도 후회를 한다. 언제나 편한 뉴스에 접할 수가 있을까? 서민들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하는 짓거리를 밥먹듯이 해대는 정치꾼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한 해의 끝머리다. 내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녹을 주는 주인들은 안중에도 없다. 불쌍해 보이기도 하는 여의도를 바라보며 한 해를 마무리함이 왠지 또 서글퍼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주고받는 술자리도 많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연말이다. 내 밥그릇에만 눈먼 사람들이 목청을 높이는 연말이다. 귀를 닫고 눈을 감을 수도 없는 현실 속에 무한한 말의 향연 속에 견디어야 하는 몸, 언제나 신중하려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또 되뇌어본다. 아직도 몇 개의 송년회가 남아 있다. 삶의 마지막 12월 인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껄일 이유는 없다. 오늘은 가능하면 듣기만 해야지! 이왕이면 들어주며 즐거워해야 좋은데, 그렇게 될지 알 수 없는 연말이다. 올해만은 꼭 더 많은 덕담을 해야겠다. 일 년을 살아오면서 모든 일이 감사하고 또 고마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