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 집을 가면서)
햇살이 따가운 오후,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부산 딸네집에나 갈까?
아내가 깜짝 놀라며 거든다. 전화 한 번 해 보라고..
얼른 이층으로 올라가 전화를 들자 부산 사는 딸의 전화다. 주말에 무슨 계획이 있느냐 한다.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말에, 부산에 놀러 오라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의견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
사위가 맛있는 술이 있는데, 혼자 마실 수 없으니 전화해 보라 했단다.
부산에 사는 딸은 계절마다 전화를 한다. 계절 따라 나오는 신선한 회를 맛보라며 초대를 하는데, 살가운 사위의 잔잔한 스케줄과 계절 따라 불러주는 딸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내는 보따리를 싸느라 바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상추며 열무김치를 준비했고, 지역 로컬 푸드에서 사위가 좋아하는 식혜
그리고 딸이 좋아하는 완두콩을 준비했다. 어울리지 않게 어른 식성을 닮은 손녀는 다슬기 국을 좋아한다.
어렵게 준비한 다슬기국을 싣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부산까지는 270여 km다.
언제까지 이 먼 거리를 운전할 수 있을까?
고희의 청춘은 아직 거뜬하게 오고 가지만, 앞으로 10년만 더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덥지만 마음만은 가벼운 부산행, 딸과 사위가 기다리고 손녀가 반겨준다.
긴 운전 끝에 도착한 부산, 서둘러 퇴근한 사위와 딸 그리고 손녀가 기다리고 있다.
부산에는 언제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해야 할 행복한 할당 몫이 있다.
딸과 사위가 배려해 주고, 손녀가 생각해 주는 부산에서의 할아버지의 몫은 무엇일까?
부산에 왔으니 신선한 회를 맛봐야 했다.
언제나처럼 사위가 안내 한 횟집에서 신선한 회와 소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다.
조금 비싼 듯한 횟값은 누가 내야 할까? 슬쩍 아내한테 내라 하지만 어림도 없다.
서둘러 딸이 카드를 내밀며, 내일 소소한 점심값을 아빠에게 할당한다. 딸이 준 아버지의 몫이다.
소주 한잔에 서늘한 부산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긴 운전으로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보내고
약속이 있어 서둘러 돌아오려는 길, 손녀가 말을 건다.
조금 더 계시다 저녁에 가시든지, 아니면 내일 아침에 가시면 안 되느냐고.
왠지 가슴이 찡해 온다. 다음엔 약속을 잡지 않고 오겠다며 답을 했지만 손녀에게 고맙기만 하다.
할아버지라고 특별하게 해주는 것도 없고, 살갑게 놀아 주지도 않는다.
할아버지만큼 역할만 하려고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다.
하지만 손녀의 마음은 다르고 언제나 따스하다. 할아버지가 저를 위함도 알고 가족의 정도 알아간다.
조금 더 있다 가시라는 말, 내일 아침에 가시면 안 되느냐는 말은 언제나 가슴이 따스해 온다.
딸이 얼른 하는 말, 할아버지와 문방구엘 다녀 오란다.
언제나 부산엘 가면 할아버지의 정해진 코스다.
손녀가 필요한 소소한 것을 봐두었다 할아버지가 함께 가게 하는 딸이 남겨 놓은 할아버지의 몫이다.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할아버지 역할을 하며 손녀와의 추억을 갖게 하려는 배려다.
엄청난 것을 사는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답지 않은 작은 장난감이다.
거울이며, 수첩이거나 작은 스티커가 전부다. 값이라고 해야 5천 원도 되지 않는 값이다.
한참을 고민하다 찾아낸 수첩, 기껏해야 돈 천 원이다.
오랜만에 왔으니 더 사라 했지만, 이것이면 충분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할아버지와 긴 실랑이를 하지만 어림도 없다. 문방구점 주인은 빙긋이 웃어준다.
슬쩍 4천 원짜리 수첩을 건네주자 몇 번을 사양하다 함박웃음을 웃는다.
거금 4천 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돈, 늘 근검절약을 알려주는 엄마의 삶이 담긴 모습이다.
얼른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손녀, 할아버지의 몫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볍고도 따스하다.
딸이 넘겨주는 아버지의 몫, 손녀에게 남겨 놓은 할아버지의 몫이 있어 부산행은 늘 행복한 걸음이다.
(여성시대 소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