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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l 22. 2024

여름 한 나절, 강낭콩은 그렇게 익어갔다.

며칠을 질퍽거리던 긴 장마가 주춤한 한 나절, 초가지붕 위로 큰 감나무가 넘실거린다. 

바람 따라 풋감이 바람그네를 타면, 감나무 잎에 머물렀던 빗방울이 툭하고 떨어지던 날.

호젓한 툇마루에선 가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밭일을 하다 큰 빗줄기에 쫓겨 오신 아버지가 고단한 몸을 뉘이신 것이다.

기어이 고단함을 이기지 못해 코를 골며 여름 한나절을 보내고 있는 사이, 어머니는 쉴 틈이 없다. 

실하게 영근 강낭콩을 까서 양재기에 던져 넣는 소리가 한가롭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다.

텃밭 일을 하시다 거센 빗방울을 핑계로 잠시 쉼을 가질 만도 하지만 어림도 없다.

희끗한 머릿결이 성근 머리엔 허연 수건이 질끈 묶여 있다. 

쉼 없이 강낭콩을 까시는 어머니는 늘, 밥이 싱겁다 하셨다.

밥이 싱거워 강낭콩이라도 넣어야 한다는 어머니, 나는 콩이 싫은데 밥이 싱겁다며 강낭콩이나 팥 또는 보리쌀을 넣어 드시곤 했다. 밥이 맛있는데 왜 싱겁다 하실까? 정말일까 늘 궁금했다.


장맛비가 잠시 그친 오후, 아내가 텃밭에서 수확한 강낭콩을 까고 있다. 자그마한 텃밭은 넓어야 10평도 되지 않는 주택에 있는 보물 창고다. 값으로 따지면 보잘것도 없는 채소며 토마토, 강낭콩 등을 수확해 요리를 하며 신기해한다. 땅에 심어만 놓으면 싹이 돋아 고추가 열리고, 토마토가 붉어지는 자연의 신비함 때문이다.

빈 구석에 아욱씨와 시금치를 뿌려 놓고, 텃밭에 심은 강낭콩이 영글어 아내가 까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어머님의 모습이 퍼뜩 떠오른다.

장맛비가 머뭇거리는 날 어머니는 밥이 싱겁다며 강낭콩을 까셨는데, 왜 밥이 싱겁지? 

오래전 철부지 아들의 생각이었다.

늘 궁금했던 밥이 싱겁다는 말, 이젠 철부지가 어머님의 세월이 되어 밥이 싱거워졌다.

밥이 싱거워 그렇게도 싫어하던 콩을 넣고, 현미를 섞어 밥을 지어먹는다.


이른 봄날, 부산에 사는 손녀가 찾아왔다. 밥이 싱겁게 된 철부지 아들이 손녀와 함께 텃밭에 강낭콩을 심었다. 언제 싹이 나오나 아침마다 바라봐도 보이지 않더니 드디어 앙증스러운 새싹이 돋았다.

며칠 후 사진을 찍어 손녀에게 보냈더니, 다행이라며 큰 소리로 환호를 보냈다.

지난해 학교에서 심은 콩을 돌보지 못해 죽게 한 것이 일 년 내내 가슴에 남아 있었는데, 일 년간 가슴에 숨어 있는 죄스러움을 조금은 갚은 것 같아 너무 다행이란다. 손녀의 착한 마음에 깜짝 놀라게 한 강낭콩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손녀의 뜻밖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던 강낭콩을 아내가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답지 않게 어른 입맛을 닮은 손녀는 나물이며 콩 종류를 좋아한다. 기회가 있으면 콩을 사주고, 콩이 생기면 딸네 집이 우선이다. 아내가 수확하는 강낭콩이 그리운 어머님과 귀여운 손녀를 소환한 것이다. 

풋풋한 강낭콩이 실하게 영글었다. 하얀 쌀밥에 넣어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고소하면서도 싱겁지 않은 맛있는 밥이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밥이 싱겁게 된 고희의 아들이 강낭콩을 심은 이유다.

여름 장마를 여러 해 겪으며, 어머니의 강낭콩이 아내의 강낭콩이 되었고,

다시 손녀의 강낭콩이 되어 또 다른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벌써 밥이 싱겁게 된 철부지 아들, 아무리 밥이 싱겁더라도 조금만 넣어 먹고

심은 콩을 돌보지 못해 미안해하던 손녀에게 모두 보내줄 예정이다(2024.07.15일 MBC 여성시대 방송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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